슬픔에 대하여

발행일 2019-11-28 09:49:2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슬픔에 대하여 /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 시집『마늘촛불』(애지,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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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운전을 할 때 마주 오는 차의 전조등 불빛이 직접 눈에 닿으면 눈부심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는 경우가 있다. 가로등이 없는 지방 도로에서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요즘은 터널에 불을 환하게 밝혀 그런 일이 적지만 주간에 갑자기 어두운 터널로 들어설 때도 현혹현상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극장 같은 캄캄한 곳에 갑자기 들어서면 처음엔 주변이 하나도 뵈지 않는다. 한발 앞으로 떼기도 멈칫거려진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차차 주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에도 눈부심을 느끼는데 시간이 지나야 눈은 정상기능으로 복귀한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외부의 자극에 감각이 익숙해지는 순응이다. 일시적으로 현혹된 눈이 원래대로 회복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순응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의 차이가 크다. 전자의 ‘암순응’이 완료되기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후자의 ‘명순응’ 즉 눈부심이 사라지기까지는 1~2분이면 족하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가끔 영화관을 찾았다. 임권택 감독의 첫 작품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몇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깜깜한 극장에서 잠시 내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던 엄마의 다정한 손과 함께.

극장 밖을 나올 때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내 눈을 잠깐 가렸었는데, 순간 엄마라는 완벽한 우산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안도했다. 시인이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을 보고선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을 환기해낸 것은 엄청난 시적 서정의 발견이다. 이미 그러한 동작은 폐기되었거나 후미진 추억의 곳간 속에나 처박혀있는 것이어서 좀처럼 인출되기 어려운 품목이기 때문이다. 순응이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순순히 잘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적 건강하셨던,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던 어머니였는데 4년 전 갑자기 쓰러지시고 100일간 병원에 누워계시다가 저 암묵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 백일간의 암흑천지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비유는 가당찮지만 암순응에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밥을 처먹고 똥을 싸고 이빨을 닦았다. 하지만 거울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면서 수염 깎는 일만은 차마 할 수 없어 100일 동안 수염은 그대로 방치했다. 내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어머니 가시고 명순응에 적응하기까지의 시간은 훨씬 더뎠다. 아니 지금도 완전히 적응했다고 할 수는 없다.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여전히 어머니의 손길이 그립다. 어쩌면 ‘눈이 상할까봐’ 더 큰 슬픔을 가리는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이 작동중인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덮는가. 세상의 모든 슬픔 앞에 어머니의 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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