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추수감사절

발행일 2019-12-05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변해가는 추수감사절

성민희

재미수필가

오븐에서 연기가 솔솔 난다. 해마다 한 번씩 맡는 냄새다. 터키 굽는 냄새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진하게 냄새가 풍겨 와도 감각이 없더니 이제는 눈을 감고 그 속에 푹 잠기고 싶은 향기가 되었다. 딸이 정성껏 요리한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소금, 후추, 설탕과 버터를 넣어 잘 으깬 매쉬드 포테이토, 샛노랗고 부드러운 미국고구마에 머쉬멜로를 넣어서 구운 야미, 크림콘, 그린빈, 그레이비, 스태핑, 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디너롤 등이 알록달록 식탁을 채운다.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두 모여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만찬식탁이다.

딸은 모든 음식을 본인이 할 테니까 사촌들은 디저트와 음료수만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김치와 잡채를 배당 받았다. 양식을 실컷 먹고도 뒤늦게 끓여낸 김치찌개와 밥을 반가워하던 어른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할 때는 보이지 않던 와인바도 세련되게 차려졌다. 갖가지 종류의 치즈와 잘 쪄진 브로클리와 당근, 블랙베리, 페퍼로니, 올리브와 땅콩 등 미국사람들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간이 되자 식구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모두 빈손으로 오라고 했는데도 들고 온 과일 박스와 과자 상자가 한쪽 벽 밑에 쌓인다. 보스톤에서 날아온 조카는 공부하느라 힘이 들었는지 얼굴이 더 창백해 졌고, 첫 직장을 잡은 막내 조카는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얌전한 치마 아래로 스타킹까지 신었다. 올 봄에 결혼한 조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모습이 의젓하다. 딸은 집을 휘젓고 뛰어 다니는 두 꼬마를 붙잡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다. 제법 엄마 티가 난다. 갈색으로 잘 익은 터키를 오븐에서 꺼낸 사위가 양손에 칼을 쥐고 나선다. 남편과 오빠와 남동생, 나와 올케들과 여동생이 하던 일이 모두 아이들 손으로 넘어갔다.

어머니 대신 남편이 감사기도를 한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는 본인도 힘들고 곁에 사람에게도 폐가 된다며 아예 오시지 않았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모든 가정을 한 바퀴 돌던 느리고 평온하던 기도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알아듣든 말든 상관이 없던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하던 기도는 짧고 간단한 영어 기도로 바뀌었다.

할머니의 긴 감사 기도를 견디지 못하고 킥킥 팔꿈치로 서로 찔러대던 아이. 높은 식탁에 팔이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하고 서서 애를 태우던 아이. 여드름이 퐁퐁 솟은 얼굴에 노랗게 물든 머리를 하고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래키던 아이가 모두 사라졌다. 보이프렌드와 걸프렌드를 수줍게 소개하던 아이도 이제는 아예 배우자를 따라 가버리거나 먼 나라에서 전화 목소리만 들려주는 어른으로 변했다. 커다란 냄비를 든 엄마 뒤를 쫄랑쫄랑 따라 들어오던 꼬마들이 어느새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식탁도 그대로고 그릇도 그대로고 그 때 켰던 그 촛불도 변치 않았는데, 아니, 우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미국 온 첫 해의 추수감사절 날에 지인의 초대를 받았다. 어떻게 지내는 미국의 명절일까 막연한 설레임으로 나와 남편은 한국 배를 한 상자 사 들고 갔다. 그날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은 도무지 낯설었다. 말로만 듣던 터키는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요리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커다란 접시에 터키와 햄을 듬뿍 얹고 그 위에 그래이비를 끼얹어 잘도 먹던데 나는 으깬 감자와 달콤한 크랜베리 소스만 먹고 돌아왔다. 추수감사절 만찬이 어떤 건지 비로소 알게 된 늦은 저녁. 우리는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얼큰한 라면을 또 끓여 먹었다.

모든 상점이 일체 휴업을 하던 그때와는 달리 요즈음은 문을 여는 상점이 늘어난다. 집에서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만찬을 즐기던 풍조가 조금씩 사라지고 요즘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가족도 많아졌다. 집에서 구워야만 하는 줄로 알았던 터키와 햄은 주문만 하면 배달되기도 한다. 현지 언론이 조사한 결과 올해는 한인타운의 상점도 90%정도가 문을 연다고 한다. 타지에서 온 가족들이 아예 한인타운의 식당에서 만나 먹고 샤핑도 즐긴다는 소식이다. 차도 사람도 없던 추수감사절 거리가 이제는 오히려 분주해졌다. 어떤 가게는 오후 4시부터 오픈하여 이른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한다고도 한다.

비릿한 냄새가 느껴져 한 입도 못 먹던 터키를 40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고향처럼 정다우니 아이들이 변했다고, 세상이 변했다고 쓸쓸해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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