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 고은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 시집『만인보』(창작과비평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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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5일은 넬슨 만델라의 6주기이자 현대사의 증인이라 할 리영희 선생이 타계한 지 9년째 되는 날이다.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글로써 진실과 정의를 알리려했던 선생이었다. 작가 이병주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상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향 아래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듯 세상은 리영희에 빚진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로 구분될 수 있다. 나도 ‘사상의 아버지’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한때 ‘사상의 은사’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양심이 있고 양식을 가진 모든 젊은이들에게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귀감이었다. 좌절과 고난으로 점철된 1970년대, 냉전의 우상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지성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은 당시 실의에 빠진 청년학생들에게 영롱한 진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사상적 은혜를 베풀고 떠난 선생의 글을 책으로 처음 접한 건 ‘전환시대의 논리’지만, 그보다 ‘偶像과 理性’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도전에는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라고 설파한 첫머리는 영원히 간직해야할 말씀으로 몇 번씩 꼭꼭 접어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주머니 밑창이 타개지고 말씀들은 야금야금 새나갔다. 선생께서도 훗날 책의 개정판을 내면서 “우리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이거나 ‘넋두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생의 바람과 내 망각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망각의 소이인 일상의 고단함에 굴복한 무뎌진 감각 탓도 있겠고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인 나태도 원인이 되었으리라.

수많은 항쟁과 민주적 혁명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선생의 가르침대로 양심을 가동했건만, 이성은 단단하지 않았고 논증은 철저하지 못했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용기마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로 선생이 바라는 대로 ‘우상’이 판치지 못하는 세상을 소망하건만,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낯 두꺼운 권력의 유령들에 의해 국정이 망가져가는 어이없는 세상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정의와 진리가 보편타당해진 세상에서 선생의 저서들이 극복되는 날은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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