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가운데 서야 정확하다

박운석
가운데 서야 정확하다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시대 중기 시인이자 문신이었다. 하루는 임제가 잔칫집에서 얼큰하게 취했다. 취기에 한쪽 발엔 가죽신을 신고, 다른 쪽엔 나막신을 신고 말에 올랐다. 하인이 짝짝이로 신었다며 말하자 그는 도리어 하인을 꾸짖었다. “어차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가죽신만 볼 터이고 왼쪽에 있는 사람은 나막신만 볼 텐데 무슨 문제란 말이냐!”

정민 한양대 교수가 그의 저서 ‘죽비소리’(마음산책)에서 소개한 백호 임제의 일화다. 말을 기준으로 해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가 신고 있는 신발도 달리 보일 수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하고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나막신을 신었다고 주장한다. 다들 자기가 본 것만으로 으레 반대편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한다. 정면에서 보면 짝짝이로 신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도 서로 “가죽신을 신었다” “아니다, 나막신을 신었다” 싸움판을 벌인다.

이런 싸움판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말의 정면에서 바라볼 생각은 애초에 없다. 모두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삼는다. 자기보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죄다 ‘수구꼴통’에 ‘토착왜구’다. 반대로 자기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빨갱이’에 ‘좌좀(좌파좀비)’으로 매도해버린다. 애초부터 보수나 진보라는 이상적인 말마저 실종되고 없다.

극우 아니면 극좌뿐. 양극화가 심하다보니 서로를 인정하기보다는 혐오한다. 그것도 극혐이다. 이 사회에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는 없어진 지 오래다. 지난달 19일 열린 ‘80년대생에게 듣는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토론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30대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이날 발제에 나선 이수인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과 학생은 “30대에게 정치는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며 “조국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진영 논리에 빠져 내년 총선을 위한 혐오 문화 조성에만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30대는 다른 세대를, 다른 구성원들을 혐오할 이유와 여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김성훈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도 “진보와 보수 두 진영에서 누구를 혐오하고 적대하는지는 분명한데 어떤 걸 만들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30대들이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중간을 포용하지 못해서다. 중도보수나 중도 진보는 설자리조차 없다. 왼쪽과 오른쪽만 있지 중간이 없다. 여기에 더해 흑백 중에서 어느 쪽인지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여기도 회색지대는 없다. 오히려 미지근한 회색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워 비난을 퍼붓는다. 좌우, 흑백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시켜줄 중간 영역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완충지대가 사라졌으니 극렬한 대립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 중도좌파적 지식인이라 하는 리영희 교수는 평론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진실은 균형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갈 데까지 간듯하다. 감정을 앞세워 내가 옳네, 너가 틀렸네 하는 동안 좌우 날개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럼 누가 이 역할을 해야 하나. 완충지대인 중도층이 넓어져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짝짝이 신발임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은 가운데뿐이다. 정민 교수는 이를 시비재중(是非在中)으로 표현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중간에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선 오른쪽에 서서 봐서도, 왼쪽에 서서 봐서도 안된다. 가운데 서야 정확하다.

오른쪽에 선 사람이 “가죽신”을 외치고 왼쪽에 선 사람이 “나막신”을 외칠 때 누군가는 가운데에 서서 짝작이 신발을 신었음을 알려줘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중간이 없다. 중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는 중간, 중도층을 키울 때다(이는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나타나는 무당층과는 다르다). 정치권을 보고 가운데 서서 보라고 해봤자 소귀에 경읽기다. 국민들 스스로가 중앙에 서서 길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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