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엄원태



이 저녁엔 노을 핏빛을 빌려 첼로의 저음 현이 되겠다/ 결국 혼자 우는 것일 테지만 거기 멀리 있는 너도/ 오래전부터 울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날카로운 선율로 가슴 찢어발기듯 흐느끼는 동안 나는/ 통주저음으로 네 슬픔 떠받쳐주리라/ 우리는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다/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로 ......



-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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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 12월이었다. 대구에서는 이례적으로 14층 발코니 창밖에 함박눈이 흩날렸고 불현듯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헨델의 라르고인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윽한 첼로 선율이 깔린 클래식CD를 밀어 넣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눈 오는 날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도 와인과 벽난로는 없더라도 몸이 푹 파묻히는 소파가 있어야 하고 거실도 좀 넓어야겠다는.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이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첫 사랑의 마른 입술을 힘겹게 추억하며 힘껏 들었어야 할 음악이 있다. 그럼에도 내 불운과 불찰과 무지가 겹쳐 그러지 못했다. 속으로 소리를 조이고 삼키면서 우는 바흐의 ‘샤콘느’를 알지 못했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비탈리의 ‘샤콘느’를 애잔하지만 그저 평범한 바이올린 곡으로 알았다. 오래전부터 울고 있었던 날카로운 선율이 가슴 찢어발기는 흐느낌인줄 몰랐던 거다. 바흐의 중후한 울음은 확실히 남성적이었다. 첼로의 낮은 음이 통주저음으로 비탈리의 슬픔을 떠받쳐주었다. 따로 울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였다.

한없이 내려와 가랑이 사이에서 내리긋는 보잉은 모든 내장기관과 피부의 솜틀까지 전율케 한다. 이성복 시인은 음악이란 시에서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보면 음악을 몰랐던 것이다. 음악을 듣긴 들어도 진짜로 음악에 빠져본 경험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는 가수다’라는 텔레비전 프로에서 가수가 노래하는 동안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대는 관객을 보면서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몰입해서 들으면 정말로 저렇게 심금을 울리기도 하는가보다 이해했었지만 나는 한 번도 클래식이건 대중가요건 음악을 들으면서 울어본 기억은 없다. 오래전 평양공연을 다녀온 조용필이 자기 노래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을 했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노래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기에, 마음이 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악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눈물 흘리는데 옆의 눈치 보겠나. 서로의 마음을 활짝 열었던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혼자 울지만 유행가건 클래식이건 음악에 빠져들 땐 그것이 다 내 이야기고, 내 슬픔과 감정에 이바지한 선율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들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있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 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 그 사이로 복제되지 않은 사랑은 끝없는 비상을 한다. 현의 슬픔이 가랑이보다 더 깊은 골짜기로 이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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