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41) 장보고

발행일 2019-12-16 09:19:5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청해진을 설치해 해상무역을 주도하며 나라를 지키던 장보고, 간신의 무리에 허무한 죽음

중국 위해 적산장보고기념관이 신라시대 장보고가 설치했던 법화원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전시관 입구에 당나라 무관이었던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보고는 신라인이지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 더욱 유명한 인사로 기록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당나라로 들어가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장군이 되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백성을 돌보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반란군으로 낙인이 찍혀 허망한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반란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보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내용은 없다. 간신배들의 혀 때문에 충신의 허망한 죽음이 생산된 것이다.

해상왕 장보고의 충의와 강직한 신념으로 펼쳤던 업적,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던 그의 활달한 외교의 흔적을 찾아 오늘날 교훈으로 곱씹어본다.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가 흥덕왕을 찾아가 백성을 지키기 위해 군사 1만 명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간청해 허락을 얻어 청해진을 설치해 동아시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했던 근거지 완도.
◆역사 속의 장보고

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궁파(弓巴)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궁복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변환해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부터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

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완도에서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

그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828년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해 허락을 얻었다. 청해진 대사로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완도 곳곳에 청해진을 설치해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요새로 만들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장군샘.
그의 전력은 왜구의 노략질과 당나라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쳐 제압하고, 멀리 인도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포용해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했다.

845년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의 주된 줄거리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더 확인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신라 궁성에서는 장보고의 죽음에 이어 청해진을 없애고, 병사들과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의 아성은 이후로 무너져내렸다.

완도 해변에는 선단에 우뚝 선 장보고 동상이 있다.
◆완도 청해진 장보고유적지

장보고는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시설, 다양한 생활시설과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신라하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항만시설과 유적들이 대거 발굴됐다.

청해진은 완도에서도 썰물, 밀물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작은 섬이 되는 장도를 위주로 성을 쌓고, 접안시설 등의 수비와 공격이 용이한 요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목재 다리를 만들어 걸어서 장도를 둘러볼 수 있게 했다.

신라시대 청해진유적지 장도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입구까지 330여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는 소나무 말뚝, 목책이 박혀 있다.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우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최근 당시 모양을 살려 복원한 우물이 장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완도에는 장보고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게 장보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청해진 입구에 외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내성문을 설치해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를 설치해 두고 있다.

청해진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도 일대는 사적지 제3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청해진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바다의 삼면을 살필 수 있어 접근하는 선박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

장보고가 당나라의 무관이었던 시절 설치해 신라인과 일본 승려들이 쉬면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던 적산법화원. 중국이 최근 복원해 전시관을 설치했다.
◆중국 위해 적산법화원

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주변에 신라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이 있었다.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823년경에 창건했다.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한 것으로 장보고가 나중 무역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적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장소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연락을 하는 기관의 역할도 담당하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 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이곳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옌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장보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글을 남겼다.

장보고전시관 입구 현관벽에 동판으로 설치된 장보고의 해상전쟁도.
◆새로 쓰는 삼국유사: 장보고의 전쟁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과 승마, 창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신라의 계급사회에서 뜻을 펼치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인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무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령군이 감축되면서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지키기로 했다.

청해진의 본거지로 보이는 작은 섬 장도 내부에 설치했던 내성.
흥덕왕을 찾아가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백성이 외국으로 팔려가는 일을 막고, 해상으로 침투해오는 왜구와 당나라 해적들을 토벌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청원을 했다.

흥덕왕이 이를 허락하여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남방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일본과 중국반도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서역까지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거상으로 성장했다.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명한 내용이 기록된 흥덕왕비편.
장보고는 또 중국 위해지역까지 진출해 신라인들이 편안하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 적산법화원을 세워 운영했다.

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징이 왕권쟁탈전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의탁해오면서 운명의 여신은 불길한 기운을 함께 던져주었다.

김명이 뜻을 함께했던 희강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해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우징은 장보고에게 “하늘을 두고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장보고는 “흥덕왕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나는 바다를 지켜 신라의 백성을 돌보기로 했소.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면서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불의한 임금을 제거하도록 했다.

청해진 앞바다가 훤히 조망되는 섬의 언덕에 설치된 장보고전시관에서 바라본 전경.
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아버지가 장보고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보고는 이에 대한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세력을 우려한 왕의 측근들은 간사한 계략으로 장보고를 제거키로 하고 염장을 파견했다.

장보고는 왕의 신하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소”라며 문성왕의 밀지를 받고 달려온 염장의 칼끝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

결국 간사한 무리들의 혀로 인해 해상왕 장보고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계 해상왕의 명성과 함께 청해진의 철옹성도 함께 무너졌다. 신라가 주름잡았던 해상 무역권까지 힘을 잃고 백성의 안위까지 담보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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