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4월22일 청도군 신도리를 본보기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행할 것을 제창한 것이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의 시작이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1969년 8월4일 경남 수해복구 현장 점검을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내려 직접 목격한 청도군 신도리 주민들의 복개천 공사 모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4월22일 청도군 신도리를 본보기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행할 것을 제창한 것이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의 시작이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1969년 8월4일 경남 수해복구 현장 점검을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내려 직접 목격한 청도군 신도리 주민들의 복개천 공사 모습.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청도군의 2020년은 더욱 특별하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지 50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은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우리나라의 가난했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1970년 시작됐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삼아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이다.

또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도록 농촌을 우리 스스로 바꿔보자는 빈곤 퇴치, 의식 개혁 운동이다.

정부는 스스로 노력하는 마을에 집중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조(自助) 경쟁’을 유도해 농촌을 변화시켰다. 이후 새마을운동은 공장과 학교, 도시 등 전국 곳곳으로 확산했다.

▲ 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도마을의 만남을 이어준 대통령 전용기차 내부. 2011년 청도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 안에 복원했다. 대통령 전용열차는 기관차 1량, 객차 1량으로 구성돼 객차에는 집무실, 침실, 주방,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 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도마을의 만남을 이어준 대통령 전용기차 내부. 2011년 청도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 안에 복원했다. 대통령 전용열차는 기관차 1량, 객차 1량으로 구성돼 객차에는 집무실, 침실, 주방,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 청도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타던 전용열차가 전시돼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도마을의 만남을 이어준 열차로 2011년 복원했다.
▲ 청도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타던 전용열차가 전시돼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신도마을의 만남을 이어준 열차로 2011년 복원했다.
모든 국민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이 같은 변화에 빈곤국가 등 세계 각국이 관심을 보였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세계 빈곤퇴치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했을 정도였다.

50년간 160개국 6만여 명이 우리나라를 찾아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대학원과 영남대 새마을연구센터 등이 진행하는 개발도상국 공무원 연수도 호응을 얻었다.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관심을 갖게 된 새마을운동은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

◆새마을운동 발상지 신도리

6·25전쟁이 끝나고 온 나라가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

청도군 신도리가 고향인 김봉영씨의 마음 한구석에는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고향마을이 생각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문을 가르치는 선비였지만 자식만큼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게 할 만큼 교육열이 높았다. 아들이 가난한 농촌마을을 떠나 대처에서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김씨는 생각이 달랐다.

전쟁이 끝나고 황폐화된 서울을 보며 농촌이 잘 살아야 도시가 번성한다며 1957년 청도군 신도리 마을로 귀향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마을주민 이인우, 박종태씨와 의기투합한 그는 부지런하고 협동심이 강한 신도리 마을 주민들을 독려해 잘 사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다.

먼저 작고 쉬운 일부터 시작했다. 마을주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자 함이었다.

마을 구석구석에 방치된 쓰레기를 함께 치우고 꽃길을 조성했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도 청소했다.

변화가 마을에 찾아왔다. 노는 사람, 술독에 빠진 사람,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無) 마을로 변모한 것이다.

마을이 깨끗해지자 다음으로 지붕 고치기에 나섰다. 당시에는 매년 초가지붕을 수선해야만 했다. 지붕을 수선하는 일로 농사를 짓지 못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초가지붕 대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꿔나갔다.

그리고 농로를 새로 개설하고 담장을 고치고, 마을 안길을 확장하는 한편 전기 가설 등을 통해 차곡차곡 마을을 살맛 나게 꾸몄다.

▲ 1969년 8월4일 이전의 청도군 신도리 모습. 손복수씨 제공
▲ 1969년 8월4일 이전의 청도군 신도리 모습. 손복수씨 제공
▲ 1970년에 발행된 국토보존에 수록된 신도리 마을 사진. 손복수씨 제공
▲ 1970년에 발행된 국토보존에 수록된 신도리 마을 사진. 손복수씨 제공
변화의 바람은 오래지 않아 신도리 마을을 찾아왔다.

1969년 8월 고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철로변에 있는 신도리 마을의 슬레이트 지붕을 보고 기차를 멈췄다.

잘 단장된 지붕, 우마차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닦여진 마을 안길, 정비된 우물과 넓어진 농로를 보며 박 대통령은 “바로 이것이다”며 무릎을 탁 쳤다.

이듬해 4월22일 한해(旱害)지방장관 회의를 주재하던 대통령은 “지붕개량이 잘 되고 마을 주변과 안길 등을 잘 가꾼 청도군 신도리를 본보기로 우리나라의 모든 마을과 국토를 가꾸고 보존하자”라며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했다.

▲ 1970년 4월22일 한해(旱害)지방장관 회의에서 대통령은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를 본보기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했다. 손복수씨 제공
▲ 1970년 4월22일 한해(旱害)지방장관 회의에서 대통령은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를 본보기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했다. 손복수씨 제공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이다.

이렇게 경북의 작은 마을 청도군 신도리는 우리나라 고속성장의 원동력이며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새마을지도자와 공무원,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새마을운동의 표본인 신도리를 찾았다.

▲ 1971년 전국새마을지도자들이 청도군 신도마을을 찾아 견학하는 장면. 손복수씨 제공
▲ 1971년 전국새마을지도자들이 청도군 신도마을을 찾아 견학하는 장면. 손복수씨 제공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

청도군민들은 그동안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자긍심으로 더욱 새마을운동에 매진해왔다.

하지만 2009년 새마을운동 발상지라는 용어 사용과 관련해 포항시 새마을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갈등은 포항시가 기계면 문성리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개관하면서다. 이보다 앞서 발상지 기념관을 건립했던 청도군민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새마을운동 원조 발상지 논란은 결국 두 지자체 간 갈등으로 치닫고 법적 다툼으로 비화했다.

포항시 새마을회가 1971년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를 현지시찰한 자리에서의 발언을 근거로 삼는 반면 청도군은 이보다 앞서(1969년 8월) 박 전 대통령이 청도읍 신도1리 마을을 방문해 새마을운동을 구상하고 1971년부터 본격적인 새마을운동을 펼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법정까지 간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란은 재판부가 ‘포항 문성리는 전국 3만3천여 개 마을이 진행한 새마을운동의 모범적인 성공사례지 중 하나라고 보일 뿐 새마을운동이 처음 태동된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청도군의 손을 들어줬다.

또 경운대 새마을아카데미가 진행한 ‘경상북도 새마을운동 37년사’ 연구용역에서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청도군 신도1리가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됐다.

▲ 1976년 청도군 청도읍 신도마을 모습. 손복수씨 제공
▲ 1976년 청도군 청도읍 신도마을 모습. 손복수씨 제공
◆새마을운동 50주년 맞아 다양한 행사

1980년 12월1일 새마을운동중앙회 발족은 새마을운동의 변곡점이다. 모든 활동이 정부의 지원과 규제에서 벗어나 민간으로 옮겨왔다.

▲ 1981년 신도마을 복개천 포장공사 전 장면. 손복수씨 제공
▲ 1981년 신도마을 복개천 포장공사 전 장면. 손복수씨 제공


▲ 1981년 신도마을 복개천 포장공사 중 장면. 손복수씨 제공
▲ 1981년 신도마을 복개천 포장공사 중 장면. 손복수씨 제공
청도군은 새마을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5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2009~2011년 8월)을 진행했다.

새마을운동 시범단지 가꾸기인 이 사업을 통해 신거역과 신도정미소를 복원하고 새마을발상지공원 등이 조성됐다.

청도군은 새마을운동을 계승·발전시키는 과제로 미래 세대와의 단절문제 극복을 꼽았다. 올해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 새마을사업을 세대와 이념, 지역 간 갈등 극복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청도군은 우선 새마을운동 제창 50주년 및 청도군 재활용품모으기 경진대회 21주년을 기념해 21세기 새마을운동 정신인 생명살림운동을 환경축제로 격상시킬 계획이다.

매년 3월 열리는 청도군 환경축제에는 전국의 재활용품 업체에게 품목별 부스를 지원해 자원순환 중요성을 알리는 등 청도군 재활용품 경진대회를 홍보한다. 새마을운동 사진전과 전시회도 함께 열려 새마을지도자, 지역민에게 볼거리도 제공한다.

또 청도 새마을 대학을 개설, 운영한다. 새마을운동 50년 역사와 성과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새마을운동을 계승·발전시키는 역사자료로 활용한다. 교수 등 전문가를 통한 다양한 주제 강좌를 개설해 새마을운동 기본정신의 이해와 자질을 키울 방침이다.

나아가 새마을운동의 학문적인 가치를 개발도상국과 공유하고 세계 빈곤퇴치를 위한 국제사회와의 협력방안도 모색한다.

청도군은 일부 아시아 국가와의 토론을 넘어 아프리카 등의 다양한 국가와의 새마을운동 공감대를 형성하는 새마을국제학술대회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을 통한 국제 교류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지역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국제 경제협력 우호관계 형성에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이승율 청도군수 인터뷰

▲ 이승율 청도군수
▲ 이승율 청도군수


이승율 청도군수는 새마을운동 50주년을 맞아 “새마을운동은 생활터전에서 새마을지도자가 중심이 돼 주민들과 합심 단결해 주어진 열악한 여건들을 극복하며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마을개발”이라며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고 학벌과 계층의 높고 낮음도 없고, 오로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 ‘잘 사는 마을을 만들자’라는 대동단결의 힘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군수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신도리 역사에 대해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시작이 됐고, 어떻게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라고 확신했다.

또 “2013년 6월18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 새마을운동의 성공 경험이 세계 인류가 공유하는 소중한 자산이 됨과 이 모든 공적의 바탕에는 새마을지도자들의 눈물이 어려 있고 피와 땀이 배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시대는 흘러갔지만 초기 정신은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처럼 새마을운동 50주년을 맞아 새마을운동 발상지로서 새마을운동의 반세기 역사를 군민과 함께 기념하고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청도군이 부농의 고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산희 기자 sanh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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