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전유성씨는 한때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무릎을 탁 치게 할 제목 덕인지는 몰라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인기가 있었다.

물론 즐겁게 살기위해 비겁해지라는 내용은 아니다. 고정관념을 없애자는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전개한 책이다. 그답게 반어적 화법으로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내용이다.

이 책 제목과 다르게 자존심을 지키라는 뜻의 영화 속 대사도 한때 유행이었다. “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2015년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영화 ‘베테랑’(감독 류승완)에서의 대사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서도철 형사 역을 맡았던 황정민이 재벌과 결탁해 부정행위를 저지른 동료 경찰의 팔을 비틀며 한 말이다. 이 말은 한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한국 영화사에서 남을 만한 명대사로 꼽혀왔다.

‘가오(かお·顔)’는 ‘얼굴’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괴물이 가오나시다. ‘가오나시(顔無し)’는 얼굴이 없다는 말이다. 사실은 쓰지 말아야 할 일본말이다. 그 전부터 가오라는 말이 종종 쓰이긴 했지만 영화 베테랑에서의 이 대사 이후 확 살아났다.

가오는 있는 척 허세를 부린다는 뜻이지만 체면, 자존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서도철 형사가 말한 가오는 바로 자존심을 뜻한다. 박봉 속에서도 사회정의를 실현해내고 있다는 형사라는 직업적 자존심이 이 말 속에 담겨있는 뜻이다.

이 영화 속 대사가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지난 19일 학교에 사직서를 내면서다. 진 교수는 사직서를 낸 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이젠 자유다!”라고 했다. 그가 SNS에 올린 이 글이 한동안 화제로 떠올랐다. 진보진영 교수이면서 그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했다. 또 조 전장관에 적격 판단을 내린 정의당에 탈당계를 내기도 했던 그다. 그가 ‘가오’를 언급한 정확한 의미를 알 길은 없다. 다만 허세 부리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미인 것 같기는 하다.

이 글을 보고 의아심을 들게 한 것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비겁하지 않게, 또 ‘가오’있게 사는 게 쉬운 일일까. 전유성의 책 제목처럼 조금만 비겁하면 즐거운 게 인생인데 말이다.

사실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요지경 상황을 보면 영화 ‘베테랑’에서처럼 비겁함으로써 즐거운 인생을 얻으려는 인간들을 너무 자주 접한다. 이 영화 내용이 그랬다. 크고 작은 ‘비겁함’을 통해 즐거운 인생을 얻는 인간 군상들. 딸의 연주회를 위해, 아들의 취업 청탁을 위해 불의와 결탁하는 경찰과 검찰 간부들. 광고를 통해 비리 기사를 막으려는 재벌가들. 다들 돈 많은 부자들이고, 국회의원들이고, 권력자들이고, 언론인 같은 나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다.

이처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픔이 현실에도 남아 있다.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다. 현실은 영화 속 대사처럼 감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생이 즐겁기 위해선 조금은 비겁해져야 한다는 군상들을 너무 자주 봐와서다.

그래도 세상에는 돈보다, 권력보다 귀중한 게 많다. 오히려 줄도 없고 빽도 없는 소시민들이 비겁하지는 않다. 이들은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는 대사에 사람들이 감동했던 것이다. 이들에겐 무지막지한 권력도 겁을 낸다. 이들 앞에선 돈도 ‘가오’를 세우진 못한다. 인생이 즐거우려면 조금은 당당해야 한다며 주관을 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진짜 ‘가오’있는 사람들 아닐까.

명대사로 소개된 말 외에 영화 베테랑 속에서는 이런 대사도 있다. “근데 죄는 짓고 살지 맙시다” 그렇다. 당당해야 인생이 즐겁다고 믿는 우리들이, 조그만 죄도 짓지 않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돌직구를 한번 날려보자. “우리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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