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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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현상을 노래한 많은 시는 그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인간의 삶을 대변한다. 이 시도 숲을 원경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인식과 실제 숲 속에 들어가서 본 본디의 모습이 다른데서 얻은 깨달음으로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보았을 때는 나무들 간격의 빼곡한 밀착으로 숲을 이룬다고 믿었으나, 불 타버린 숲의 한가운데 들어서서 보았더니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이치가 통하고 또 작동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 삶의 모습에도 적용된다. 진정한 사랑이나 우정은 맹목적인 밀착(혹은 집착)이 아니라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는 여유와 조화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나무들 사이의 적당한 간격처럼 사람들 사이에도 이만한 간격은 필요하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한발 떨어진 위치에서 관조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한다는 의미이다. 그 간격으로 바람이 통하고 햇빛도 들며 조화의 아름다움도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칫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처가 깊어지면 필경 사단이 나고 만다.
이런 간격의 소중함에 대한 잠언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결혼에 관하여’에도 볼 수 있다. “너희는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그 적절함과 적당함이 대충 대강으로 들리기도 하겠다. 적당히 사랑해야 적당히 아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얼핏 인간적 순수성의 결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맹목의 사랑과 우정, 믿음과 밀착은 사달이 날 경우 그 폐해는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너무나 크다. 맹목으로 윗도리 아랫도리 홀딱 벗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자, 어쩌면 심장을 잃어버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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