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기, 흰죽

발행일 2020-01-02 14:32:2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사랑의 온기, 흰죽

이성숙

재미 수필가

캘리포니아에서 맞은 독감예방 백신이 서울의 혹한을 이기기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서울에 다녀온 후 앓아누워 버렸다.

방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부엌에서 참기름 냄새가 날아온다. 남편이 흰죽을 끓여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릴 때, 별다른 약이 없던 때에 엄마는 몸살만 나도 흰죽을 끓여주었다. 뜨끈한 보리차와 흰죽, 밤을 새워 곁을 지켜주던 엄마의 손길로 바이러스를 이겨내곤 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말간 흰죽이 그리 고소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니 남편이 감기만 걸려도 죽을 끓여준다. 엄마처럼 흰 쌀만으로 끓이지 않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는다는 게 다른 점이지만. 그는 죽 조리법을 이미 대여섯 가지 갖고 있다. 새우죽, 야채죽, 소고기죽, 버섯죽에 미국 사람들이 배탈 나거나 감기 걸릴 때 자주 찾는 닭죽 등이다. 이번에 그는 은행 알을 볶아 넣어 흰죽을 끓였다. 흰 도자기 사발에 흰 쌀죽, 노란 은행이 수채화처럼 떠 있고 다진 쪽파 몇 조각이 무늬를 이루고 있다. 연한 색의 조합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쟁반에는 간장 종지와 조미 안 된 구운 김이 함께 놓여 있다. 간장은 참기름을 안 띄운 생간장이다. 친정 이모가 보내 준 햇김은 아직 바다냄새를 안고 있다. 담백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던 나는 중환자처럼 느리게 몸을 일으켜 흰죽에 간장을 조금씩 찍어 삼킨다. 목은 부드러워지고 위장은 따듯하게 데워진다. 좋다. 침대 위에서 그의 무릎에 놓인 쟁반 위의 흰죽을 나는 깨작거리며 천천히 먹어 치운다. 그는 내 엄살을 묵인하며 오작동하는 기계를 다루듯 내게 물도 건네주고 김도 부수어 준다. 죽 한 그릇을 비운 후 나는 다시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그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다독이더니 빈 그릇을 챙겨 들고 나간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 나는 이불 속에서 혼자 해죽거리다 꿀 같은 수면에 빠진다. 왜 진작 앓아누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현대 사회학의 거장 앤서니 기든스는 사랑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앞뒤 안 가리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열정적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 낭만적 사랑,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 보이는 것으로 구속이 없는 합류적 사랑이 그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뇌의 화학작용 지속 기간은 30개월 미만이다. 항간에는 이를 두고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이라고도 한다. 뜨겁고 짧은 사랑. 추억이 되는 모든 사랑이다. 합류적 사랑이란 우정 같은 것일지 모른다. 기든스는 일부일처일 필요도 없는 형태가 합류적 사랑이라고 했다. 낭만적 사랑이란 일부일처를 요구하며 뜨겁지 않고 은근하나 식지 않는 사랑이다. 상대는 자신의 결여를 메워주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는 내 허술함을 아는 사람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부자가 되고 어떻게 출세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산다. 남편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어떻게 입맛을 돋울 것인가,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흰죽을 위해 1시간 전부터 쌀을 불려두었다. 식은 밥에 물을 붓고 끓이는 것은 밥이 부드러워져서 먹기에 편하게 되는 것이지 죽이 아니라는 게 그의 견해다. 생쌀로 끓인 죽이라야 밥알이 탱글탱글하고 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는 불린 쌀을 참기름에 볶아 물을 붓고 죽을 만든다. 쌀을 저어가며 잘 볶는 게 죽 맛의 비결, 그런 후 물을 붓고 다시 저어가며 끓여 흰죽을 완성한다. 마지막에 볶아 둔 은행을 넣고 한 번 더 끓인 후 다진 파를 고명으로 올려준다. 더운 가스레인지 앞에 한 시간은 족히 붙들려 있어야 완성되는 음식이 흰죽이다. 만드는 사람의 정성 없이 가능한 메뉴가 아니다. 먹을 때도 특별하다. 흰죽을 먹을 때는 좀 툴툴 거려도 좋고 수발을 받으며 왕후처럼 굴어도 좋다. 음식치고는 희한한 음식이다.

또한 흰죽만한 위로가 없으니 그리 먹고 나면 면역이 다져져서 병은 어느새 낫고야 만다. 대상만 있다면 엄살과 위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엄살을 부리는 사람은 아무데서나 그리 하는 게 아니다. 위로 받고 싶은 사람 앞에서 엄살을 부린다. 위로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황일 때 위로 받고 싶은 방식으로 엄살하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한다.

내게 흰죽을 끓여 주던 엄마는 이제 자신의 몸도 돌보기 어려운 노구가 되었다. 어제는 서울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오메가 쓰리 좀 주문해 달라고 전화를 했더라는 얘기다. 엄마는 자신의 기억력이 자꾸 떨어진다며 뇌혈관에 문제 있는 거 같다며 오메가 쓰리를 사고 싶어 했다고 한다. 친정집 식탁에는 각종 영양보조제가 즐비하다. 오메가 쓰리도 아직 남아 있다. 엄마는 아마도 오메가 쓰리가 필요해서 전화한 게 아니다. 그녀는 지금 엄살을 부리는 것이다. 자식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엄마는 어쩌면 흰죽이 먹고 싶은지도 모른다. 제 살기 바쁜 자식들은 엄마의 엄살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휘력 떨어지는 번역기처럼 오메가 쓰리는 ‘보고 싶다, 외롭다’로 전송되지 못하고 ‘뇌혈관에 좋다’로 오역된다. 동생은 남아 있는 오메가 쓰리 먼저 드시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기억력 감퇴한 우리 엄마, 며칠 후면 내게도 전화를 걸어올지 모른다. 오메가 쓰리 주문해 달라고.

그러나, 엄마에게 필요한 건 흰죽이다, 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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