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과 책임사법

윤정대

변호사

1986년부터 약 5년 동안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벌어진 10건의 연쇄살인사건은 8차 사건을 제외하곤 지난해 9월 경기남부경찰청 전담수사팀이 5차, 7차, 9차 사건에서 확보된 DNA가 한 수감자의 DNA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모두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강간살인범으로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수감자는 경찰의 뒤늦은 수사에서 이미 범인이 잡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8차 사건을 포함하여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모두 자신이 저지른 범죄라고 밝혔다. 모두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그의 이름에 따라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바뀌었다.

1988년에 일어난 8차사건의 피의자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윤씨는 이춘재의 자백이 있은 후 재심을 청구했다. 사건 발생 당시 22세의 농기계 수리공 윤씨는 경찰에 의해 검거 직후 모방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자백하고 검사에 의해 기소되었다. 윤씨는 기소된 지 불과 약 2개월만인 1989년 10월 1심인 수원지방법원 형사재판부로부터 검찰의 구형대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윤씨는 범행을 부인하며 항소하였고 “사건 당시 친한 선배와 잠을 자고 있었는데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 형사재판부는 “피고인이 경찰 이래 원심 재판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고 침입 경로와 범행 후 피해자의 유기상태, 범행내용, 도피 경로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며 “특히 범행현장과 피고인의 체모에 대한 감정의뢰 보고서 및 소견서 등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의 범행 사실을 인정하기 충분하다”며 원심판결을 유지하였다.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국선변호인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심 국선변호인은 윤씨를 법정에서 잠깐 보았을 뿐이고 2심 국선변호인은 법정에 나오지도 않아 법정에서 다른 국선변호인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윤씨는 무기징역이 확정돼 20년을 복역했고 2009년 8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었다.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더라면 윤 씨는 끝까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혼자 울분을 삼키며 평생을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재판은 윤씨에게 무의미한 절차였다. 사실 윤씨 사건은 무죄를 나타내는 증거나 정황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소아마비인 윤씨는 현장검증 할 때 담을 못 넘어서 형사들이 잡아준 기억이 난다고 말한다. 재판부가 현장 검증을 했더라면 그가 범행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윤씨의 옷에는 농기계 수리로 인해 기름때가 묻어 있었으나 피해자의 옷과 집에서는 기름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자백을 이유로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2심 재판부와 대법원의 재판은 1심의 졸속 재판을 정당화시켰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는 그의 책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판·검사들이 일정한 틀을 미리 짜놓고 사건을 꿰맞추려 한다는 것은 당사자나 변호사들이 많이 느끼는 문제점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소통이 단절되는 것이지요. 판·검사들이 틀을 짜는 이유는 그들의 독선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건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20년을 교도소에서 지내야 했고 출소한 후 10년이 돼서야 진범의 자백 덕분에 비로소 재심청구를 할 수 있게 됐다. 검찰과 경찰은 뒤늦게 윤씨가 불법체포 후 가혹행위로 자백을 강요당한 것으로 보고 당시 수사경찰관들을 직권남용, 불법체포·불법감금, 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입건하였고 수사과장과 수사 검사도 직권남용, 불법체포·불법감금 혐의로 입건했다. 그러나 모두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이다.

우리 사법 시스템 속에서 수사의 최종 판단자는 기소여부에 대한 권한을 가진 검사이고 재판의 최종 판단자는 유·무죄와 형량에 대한 선고권을 가진 판사이다. 그러나 검사와 판사는 이러한 중대한 권한에 비해 책임은 부존재한다. 기소나 재판을 소홀히 하고 그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자신의 기소나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지도 않는다. 검사는 수사관과 판사를 탓하고 판사는 검사나 무능한 변호사를 탓할 것이다. 잘못된 형사판결에 대해 검사와 판사가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지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윤씨와 같은 사법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줄이는 길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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