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45) 효공왕

발행일 2020-01-13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천년 신라 멸망의 시작,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지고

신덕왕은 박씨 왕가 재현, 신라 위축되고 후삼국시대 시작

신라 52대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뒤늦게 진성여왕이 궁궐로 불러들여 태자로 삼았다가 왕위를 물려주었다. 릉은 경주시 배동에 특별한 시설물 없이 일반 분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조성되어 있다.


신라 제52대 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왕궁 밖에서 자랐다. 진성여왕이 이를 전해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명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효공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7세까지 15년간 재위하는 동안 군주로서 제대로 기능을 펼쳐보지 못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후반기에는 여자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아 신하가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약해졌다.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일으키고, 침략해와 신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었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즉위했다. 신덕왕은 박씨였지만 헌강왕의 딸과 결혼해, 경덕왕가의 사위라는 신분에 힘입어 국인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대에 이르러 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한 기록이 전한다. 5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승영과 위응을 낳아 54대와 55대 경명, 경애왕으로 오르게 함으로써 신라하대의 박씨왕가 세습을 재현했다.

효공왕릉 하단부에는 듬성듬성 호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돌출되어 있다.


◆삼국유사: 효공왕

제52대 효공왕 때인 광화 15년은 임신년(912)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에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또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 하면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간이나 서로 싸웠다.

신라하대 박씨 왕조를 다시 이은 제53대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다. 김예겸이 의자로 삼아 적극 지원해 왕좌에 올랐다. 서남산 삼릉의 가운데 고분이 신덕왕릉으로 전한다.


◆효공왕과 신덕왕

-효공왕은 895년 진성여왕 9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897년 진성여왕 11년에 신라 제52대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경문왕 이후부터 왕권을 둘러싸고 두텁게 포진하고 있던 화랑세력들에 맞선 예겸 등의 세력들이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이찬 예겸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여 더욱 세력을 굳혔다.

왕실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알게 모르게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어린 효공왕은 실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당시 견훤은 완산주에 터전을 잡고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신라 땅을 꾸준히 침략해 영토를 확보했다. 궁예도 이 시기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라 나라이름을 짓고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궁예 또한 남하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의 입지는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차제에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신하들이 궐기해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신덕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서남산의 소나무숲. 일출과 운무 등의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전문 작가들이 많이 몰려든다.
-신라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 후손으로 박씨에 이름은 경휘다. 912년 효공왕에 이어 즉위해 917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아들들이 경명왕, 경애왕으로 대를 잇게 해 신라말기 박씨 왕가를 이루었다.

신덕왕은 엄연히 박씨 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예겸의 눈에 들어 예겸이 의자(義子)로 삼아 사위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잇도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맏사위이자 화랑이었던 효종에 비해 왕위를 차지하기에는 입지가 한참 밀렸다. 그러나 의부였던 예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하는 덕을 누렸다.

신덕왕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지진과 때아닌 서리, 해일 등의 자연재난이 다양하게 많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도 잦아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다.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 일대는 흥륜사지로 전해지면서 사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묘사지이나 흥륜사로 전해져 이차돈 순교 기념비와 대웅전 등이 조성된 가람터.


◆영묘사

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경주시 성건동 남천의 끝부분에 있었던 절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도화상이 과거칠불 중의 제5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 지명했던 곳이다. 선덕여왕 때에 두두리 라는 도깨비 무리가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한 곳으로 전한다.

영묘사는 사천왕사를 지었던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금당의 장육존상을 비롯해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양지의 솜씨였다. 영묘사 장육삼존불은 경덕왕이 개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이 절로 옮겨 안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월성을 돌아 형산강으로 흐르는 남천 끝부분, 오릉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흥륜사지로 전해지고 있는 절터. 발굴과정에서 영묘사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칠처가람의 하나인 영묘사로 확인되고 있다.
지금 흥륜사터로 알려지며 사적 15호로 지정된 경주시 사정동 일대에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고,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최근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영묘사가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신덕왕 때에 영묘사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소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삼국시대의 도래

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영묘사터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석재들.
효공왕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간택하게 하며 실질적인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던 사람은 김예겸이다. 김예겸은 인물이 훤칠하게 잘생겼고, 키도 6장의 장신이었다.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지도자로 군림했다.

예겸은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예겸은 헌강왕이 사냥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 진성여왕에게 천거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900년을 전후해 견훤과 궁예가 서쪽과 북쪽에서 나라를 세워 후백제, 후고구려라 칭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를 압박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효공왕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세력들은 하나 둘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투항하며 살길을 찾아 떠났다.

영묘사, 현재 흥륜사 대웅전 뒤편에 남은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석불.
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효종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효종보다 명분으로 한겹 접어야 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나라를 구할 사람은 화랑도뿐이다”며 효종을 부추겨 전쟁의 선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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