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적들/ 이재무

고양이의 폭정에 시달려 온 쥐들이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다음 날부터 쥐들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중략)// 진보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멍에이며 스스로 불행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민중론자들 중에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자들을/ 은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도 있다// 내 안의 불편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 (천년의시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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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천출 벗은 자가 무리 앞에 우뚝 서 있을 때’ ‘모욕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과거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몰락하고 소작농이나 드물게는 머슴 출신이 새로 땅주인으로 등극했을 때 실제로 횡횡했던 정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각운은 맞춘다고 한 마크 트웨인의 말도 있다. 비유하자면 이 같은 일은 어떤 집단 안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고 정치판이나 문학 동네라고 예외는 아니다.

흔히 ‘시기와 질투’를 말하지만 엄밀하게는 이 둘은 다른 감정이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해 느끼는 불퉁한 감정인데 반해, 질투는 자신이 이미 소유한 것을 경쟁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질투와 시기는 대부분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마음이나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모두 탐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고통(샤덴)과 기쁨(프로이데)을 합친 ‘샤덴프로이데’라는 독일어가 있다. 잘나가는 누군가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그리 되어 그 사람이 고통 받을 때 자신은 기쁨을 느낀다는 인간 내면의 중층적 심리구조를 표현한 단어이다. 한 마디로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모토로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며 즐기는 심리를 말한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보수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진보진영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송경동 시인의 <사소한 물음에 답함>이란 시의 일부다.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오래 전 ‘검사와의 대화’에서 한 평검사가 노무현 대통령께 “83학번이시죠?” 라고 말한 것도 뿌리 깊은 학벌 비하에다 오만방자한 검찰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 사례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부 민중론자들 중에서도 ‘은근, 노골적으로’ 멀쩡한 사람을 깔아뭉개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이 있다. 그리고 불편부당함으로 똘똘 뭉쳐진 무리들도 있다. 이들에게 우리의 삶을 내어주어서도 안될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내 안의 불편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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