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47) 경애왕

경애왕이 실질적인 신라 천 년 막내린 왕, 포석정 연회장일까 사당이었을까

신라 55대 경애왕은 실질적인 신라의 패망을 가져온 마지막 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경애왕의 능은 경주 배동 서남산 자락의 소나무숲이 우거진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55대 경애왕의 이름은 위응으로 경명왕의 동생이다. 형이 죽자 924년에 즉위해 927년 견훤의 침략으로 죽을 때까지 3년여의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경애왕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잃고, 고려에 의탁해 위축된 신라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후백제 견훤의 공격에 경애왕이 목숨을 잃었다. 신라는 경애왕의 죽음으로 실질적으로 망했다고 해석하는 사학자들의 목소리도 최근들어 높아지고 있다.

포석정에서 견훤의 침략을 만나게 된 경애왕은 당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백제가 침략해 올 당시는 음력 11월 엄동설한이요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점이라는 점 등을 들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애왕이 천 년 신라 박씨 왕가에 종지부를 찍었고, 나라가 패망에 이르게 만든 왕이라는 비난의 노골적인 목소리도 그의 꼬리표로 이어지고 있다.

경애왕릉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목으로 자란 소나무들이 산책로를 가르마처럼 가늘게 열어두고 있어 신비감마저 준다. 눈이라도 내리면 키 큰 소나무들이 하얀 모자를 쓰고 장관을 연출해 사진작가들이 줄을 이어 찾는다.
◆삼국유사: 경애왕

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은 갑신년(924)인데 2월19일에 황룡사에 백좌를 설치하고 경전을 읽었으며, 이와 함께 신승 300명을 대접했다.

대왕이 몸소 가서 향을 살라 정성을 바쳤다. 이 백좌가 선종과 교종이 함께 한 처음이라 한다.

-경애왕의 죽음: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을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

경애왕릉은 진입하는 입구에서부터 왕릉 주변 환경과 원경도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원처럼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다. 서쪽을 향한 왕릉의 앞을 경배하는 신하처럼 구부러진 소나무가 큰 아취형으로 인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울(경주)로 들이닥쳤다. 왕과 여러 부인 그리고 종친들은 포석정에서 흐드러지게 놀고 있었다. 군사가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엄벙덤벙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들은 후궁으로 달아나다 적에게 잡혔다.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엎드려 노비로라도 살려주길 구걸했고, 견훤은 군사를 풀어 공사간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다.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

견훤은 왕의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경애왕의 시신이 서당에 안치되자 여러 신하가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 고려 태조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신라 천 년의 왕궁은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요새다. 외부를 둘러보면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사방이 해자로 둘러싸인 자연스럽게 조성된 성이다. 경주시가 신라왕경 복원정비사업계획을 수립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경순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며 통탄했다.

그러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들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 또한 눈물 흘렸다. 왕건이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는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람을 시켜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보내주고, 여러 신하와 장수들에게 차등을 두어 선물을 내렸다.

경주 배동 서남산자락에 위치한 포석정. 경애왕이 연회를 베풀다 후백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음력 11월 엄동설한에 전쟁 중이었다는 점과,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드러나면서 경애왕이 제를 올리는 중에 견훤의 침입을 당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애왕의 죽음과 월성의 전설

경명왕이 즉위 7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어려 동생이었던 위응이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애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급급했다.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던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애왕은 경명왕과 같은 외교정책을 택했다. 막무가내로 신라 영토를 침략해오는 견훤을 견제하면서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친화전략을 필사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왕건도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는 후백제 견훤이 북쪽 경계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내미는 악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경애왕은 안정적인 후삼국 구도를 지키기 위해 신라에 보다 친화적인 고려와 손을 잡는 전략을 택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견훤에게 공격을 받아 천 년 신라의 사직이 사실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 포석정 입구.
그런데 왕건이 견훤의 조카 진호를 볼모로 받아들이고, 후백제와도 화해정책을 펼치자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밀리에 자객을 고려로 급파해 견훤의 조카 진호를 살해했다. 고려 군사세력에 살해된 것처럼 은근슬쩍 증거를 조작했다. 성격이 급한 견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고려를 원수로 간주하고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바로 고려와 전쟁을 선포하고 신라로 향하던 말머리의 상당한 전력을 고려 쪽으로 돌렸다.

견훤은 “왕건이 내 조카 진호를 죽였다. 왕건이 나의 성의를 무시하고 후백제와 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를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왕건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애왕의 대 고려 외교는 일단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고려와의 전쟁에 큰 이득을 내지 못하고 지루하게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견훤은 공격의 창을 다시 신라로 돌렸다. 견훤의 군사가 고을부를 점령하고 다시 금성 쪽으로 남하하는 속도를 높였다.

경애왕은 다급해져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견훤의 신라에 대한 공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왕건의 후원군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경애왕이 신하들과 머물러 있던 포석정으로 몰려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들을 피난시키면서 자신도 정신없이 도망하는 신세가 됐다. 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

신라 왕실의 연회장 또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으로 해석되는 포석정의 정원은 고목으로 둘러싸여 아직도 엄숙한 기운이 교교하게 흐르고 있다.
당시 신라 천 년의 궁성 월성은 사천왕들이 각자 팔부중신들을 거느리고 사방을 지키고 있어 철옹성이었다. 어떠한 외부 침략도 월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 신라의 세 가지 보물과 함께 동서남북 4대 성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전설적인 힘을 가진 사천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궁성은 천 년 동안 외세의 침입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부적인 다툼으로 왕좌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외세의 힘으로 월성이 함락된 일은 없었다.

경애왕은 이러한 월성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월성까지만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믿고 월성으로 기를 쓰고 도망 길을 찾았다. 경애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견훤의 군사들에게 맥없이 쓰러졌다. 목숨으로 퇴로를 열던 호위 무사들은 경애왕의 길을 50보, 100보씩 거리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월성의 남쪽은 토함산과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남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남천과 연접한 월성 남쪽 성벽도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애왕의 퇴로를 확보하는 마지막 길에는 후궁 비려의 칼이 있었다. 비려는 무가의 여식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려로 잠입해 견훤의 조카 호진의 목을 취한 자객 ‘무심’이 비려의 아비였다. 무심의 공을 높이 사 경애왕이 비려를 가까이에 두고 정을 주었던 것이다. 경애왕을 앞서 보내고 뒤를 지키려 검은 복면을 쓴 비려는 단도 수십여 개를 몸에 지니고 긴 칼을 양손에 들고 견훤의 사내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거친 사내들의 힘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렬한 비려의 죽음에 대한 보람도 없이 경애왕은 월정교를 넘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들에게 잡혀 치욕의 죽음을 맞았다. 천 년 신라의 막이 그렇게 내렸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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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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