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날은/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부터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빛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시와시학사, 1992)



그 누구도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는 영원한 세월 속에서 조그만 행성을 타고 잠시 함께 삶의 길을 여행하는 동반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몸을 움츠리거나 신세를 한탄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비관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충분히 넉넉할 수 있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삶의 여정은 마음가짐에 따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 좋을 만큼 충분히 풍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싹틔운 행복이란 결실은 결코 마르지 않는 화수분으로 함께 나눌수록 더욱 커지는 축복일진대 가는 세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흐르는 시간에 얽매여 축축하게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제 또 새해 새날이 시작되었으니 지난 삶을 돌아보고 매듭짓는 한편 새 마음 새 정신으로 자신을 가다듬어 볼 기회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그리던 그림을 계속 이어가도 좋고 새 도화지를 내놓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도 좋다. 그 판단은 오직 본인 스스로의 몫이다. 새해 새날은 달력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발원한다. 하늘에서 햇살이 내리고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 나뭇가지를 안고 때를 기다리던 겨울눈이 비로소 눈을 뜬다. 나무 등걸 속에서 숨죽이던 벌레들이 꿈틀꿈틀 기지개를 켜면 새들은 먹이를 찾아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음침한 골짜기마다 햇볕이 찾아들고 얼어붙은 산속에 서서히 양기가 스며든다. 눈 녹은 물이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나뭇잎은 몸을 가누어 공장 돌릴 준비를 한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우리 곁으로 살포시 내려와 꿈과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다. 새해 새날이라 하여 몸이 다시 젊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는 타성에 젖기 쉬운 우리네 삶을 새 마음 새 뜻으로 쇄신하라는 것이다.

지난해는 정말 힘든 한 해였다. 경기가 죽어 서민의 삶이 고달팠다. 북한 핵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미·중 패권 다툼의 불똥이 우리에게 튀었다. 종군위안부 합의와 징용배상판결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급기야 무역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의 한복판에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국민들은 양 진영으로 갈려 도저히 한 지붕아래 같이 살지 못하겠다는 듯 등을 돌린 채 서로를 향해 돌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흔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한다. 지난해 많이 아팠던 만큼 새해엔 지금보다 더욱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이 지면의 문향이 지친 심신을 다독이고 격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를 소망한다. 새해 새날에.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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