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정치학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설 명절이 지났다. 이제 본격적인 총선 체제로 접어들 시점이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친(親)서민’ 행보가 잦아진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서민 음식’ 먹어보기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대구 서문시장 같은 유명 재래시장을 찾는 정치인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적인 음식을 먹으며 자신이 얼마나 친서민적이며 평범한 사람인지를 내세우기 바쁘다.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하는 서민 코스프레용 식사 뿐 아니라 공식석상에서 먹는 식사도 ‘정치’의 일부분이다.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의 식사는 큰 뉴스다. 대통령이 어디서 누구와 어떤 메뉴로 식사를 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가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청와대 오찬에 칼국수를 주로 냈다. 이는 절약과 청렴, 개혁의지를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안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삼계탕으로 해결했다. 장관이나 수석들과의 만남은 물론 기업인들과의 간담회 때도 청와대 근처 삼계탕집을 찾았다.

정치인들이 공식석상에서 마시는 술은 식사보다 더 정치적이다. 대표적인 술이 맥주와 막걸리. 둘 다 서민의 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 청와대에서 주요 기업인 초청 간담회 때 치킨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는 호프타임을 가졌다. 수제맥주와 국민 간식인 치킨을 앞에 놓고 허심탄회하게 서민경제를 이야기해보자는 의미였다. 지난해 5월엔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맥주회동을 가졌다. ‘패스트 트랙(fast track)’ 안건으로 여야간 얼어붙은 분위기에서 3당 원내대표가 맥주잔을 들고 국회정상화 해법을 찾아보자는 의도였다.

맥주가 정치적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맥주집인 영국의 펍(pub)이나 독일의 비어홀(beer hall), 미국의 태번(tavern)은 예외없이 그 지역공동체의 모임 장소였다. 이곳에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며 여론이 형성되고 때론 선동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히틀러가 최초의 정치 연설을 한 곳도 맥주집이었다. 1919년 히틀러는 독일 뮌헨의 오래된 맥주집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대중들을 연설로 휘어잡았다. 자신도 맥주를 마시면서다. 히틀러는 이곳에서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일명 나치당)을 창당했다. 이후 행사와 집회도 주로 3천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이런 대형 맥주집에서 번갈아가며 개최했다. 맥주집이 최고의 정치적 공간이었던 셈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정치적 지지도를 올리는 하나의 방안으로 맥주를 활용하기도 했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집에서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홈브루어일 정도로 맥주를 좋아했다. 맥주를 통해 서민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시카고 지역 크래프트 맥주를 정상외교를 통해 적절하게 홍보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혈통인 그는 아이리쉬펍에서 아일랜드 기네스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통해 아이리쉬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도 했다.

필스너 우르켈은 체코 플젠 지역에서 생산되는 세계적인 맥주다. 체코인이라면 누구나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맥주이기도 하다. 1994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하벨 체코 대통령은 단골 맥주집으로 미국 방문단을 모셔와 이 맥주를 마시게 했다. 체코인들의 자부심을 높여준 의도된 정치적 행사였다.

갑자기 맥주 이야기를 꺼낸 건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맥주회동이 활발해졌으면 해서다. 요즘 꽉 막힌 게 정치뿐인가. 경제도, 사회도, 국제관계도 답답하다. 맥주 한잔하며 풀어보자는 뜻이다.

맥주는 서민들의 술이다. ‘친(親)서민’ 이미지로 표를 공략하는 데도 맥주가 제격 아닌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자영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라도 괜찮고, 의도된 정치적 행사여도 괜찮으니 맥주잔을 앞에 두고 자주 만나라는 말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그러다보면 얽히고설킨 현안들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맥주 속에 녹아있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온 국민들이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자칫 타이밍을 놓친다면 김빠진 맥주를 들이켜야 할 수도 있어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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