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 시대착오적이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로빈 후드’는 인기 캐릭터다. 사회부조리가 만연한 사회에 콜라 같은 시원한 직설법을 들이대는 까닭이다. ‘로빈 후드’는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고 그때마다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뻔한 이야기’에 대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번번이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탐관오리나 부자들을 무단히 죽이거나 혼내주고 그 재물을 강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착하거나 말거나 전혀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나누어주는 착한 이야기(?)에 모두 거부감 없이 박수를 보낸다. 대리만족일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상황에서 가진 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서민들에게 거저 나누어주는 ‘로빈 후드’를 싫어할 이유가 없긴 하다. 그래서인지 ‘로빈 후드’는 비단 영국만의 고유한 캐릭터는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일지매가 있고 홍길동이 있다. 고위관료의 집을 털어 ‘물방울 다이야’를 훔친 도둑도, 단지 부잣집만 털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도라 불리며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로빈 후드 신드롬’은 의외로 그 뿌리가 멀고 깊다. ‘로빈 후드’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공산사회와 만난다.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반으로 토지 등의 기본적 천연자원을 공유하고 먹거리를 같이 나누어 먹으며 빈부격차나 타고난 지위 또는 권위적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였다. 능력 있는 일원은 사냥을 잘하고 다른 씨족의 재물을 많이 빼앗아 왔지만 무능하거나 병약한 탓으로 놀고먹는 구성원도 많았다. 하지만 씨족 내 분배는 무차별적으로 공평했다. 핏줄로 맺어진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씨족구성원의 연대는 본능이었고, 비록 씨족구성원에 한정되긴 했지만, 이타주의가 공동선이었다. 연대감과 이타주의에 터 잡은 질서는 원시공산사회를 지탱한 기둥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원시공산사회를 치밀하게 재가공하여 현학적으로 리메이크하였다.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은 공산주의를 현실에 적용해보았으나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 등으로 인해 모두 실패하였다. 그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이 지금 다시 공산주의 깃발을 들고 추종자를 모으고 있는 우리 현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 깃발 아래 모인 많은 사람들이 철 지난 이념과 빛바랜 철학을 실천하고자 기를 쓰는 상황은 거의 불가사의다.

연대성과 이타주의가 적용될 수 없고 협동과 분업으로 짜여있는 거대한 글로벌 사회에서 씨족사회에서나 가능했던 폐기된 이념을 이 땅에서 다시 실험하려는 정치적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 ‘함께 잘사는 사회’를 향한 선의는 비록 인정하지만 기본가정과 환경이 맞지 않아 폭망한 실험을 왜 다시 꺼집어 낸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는 기름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다. 선의라 하여 정의를 담보해주지도 않고 악한 결과를 사면해주지도 못한다. 포퓰리즘으로 인한 일시적 지지여론이 폭망 정책을 정당화시켜주지도 못할 뿐더러 그 역사적 책임을 면탈시켜주지도 않는다. 사심 없고 대의에 충실하다고 하더라도 나라와 국민의 명운을 고려한다면 주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장시스템보다 정부시스템이 더 많은 정보를 포괄할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은 ‘빅 데이터’와 AI 및 IoT 등을 장착한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말 그대로 오만일 뿐이다.

오랜 세월 원시사회에서 생활해 온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산주의와 친숙한 셈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가족이란 공산사회에 몸담고 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 ‘함께 잘사는 정의사회’ 등의 이상향에 혹하는 지식인이 아직도 주위에 많은 이유다. 수많은 불특정 다수인과 협동·분업으로 연결된 거대한 지구촌에서 씨족사회에서나 가능했던 공산주의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악을 쓰는 무리가 준동하고 있다. 우리사회에 구름 잡는 정책을 실험 중이다. 이러한 책동을 막지 못한다면 폭망의 나락으로 추락할 뿐이다. 그 돌파구를 찾는 일이 화급하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선거를 통한 심판이다. 이번 선거로 민심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과학의 힘으로 치명적 오만을 극복해서 완벽한 계획과 효율적 통제가 가능하게 된다하더라도 공산주의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다. 공산주의는 그 시스템의 성격상 현실 정치에선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다. 1인 1표로 평등한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와 이른바 ‘빅 브라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체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논리적 모순이다. 민주주의가 옳다면 공산주의는 자동적으로 버리는 카드가 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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