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 / 조운

매화 늙은 등걸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시조집 『구룡폭포』(태학사, 2001)

조운은 전남 영광 출생으로 본명은 주현(柱鉉)이다. 3·1운동에 주동으로 가담했고, 1924년《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등 자유시 3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진출했다. 1920년대 중반 국민문학파에 의한 시조부흥운동에 이병기와 함께 후반기부터 활약했다. 시조 형식에 대한 남다른 생각으로 단시조 한 편 한 편마다 의미 있는 연행 갈이를 하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힘썼다. 작품집으로 복간된 ‘조운시조집’ 등이 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사설시조 ‘구룡폭포’는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라는 작품인데 자유시를 능가하는 절창으로 평가받으며 회자하고 있다. 실로 자연을 축사한 작품으로 단연 압권이라 하겠다. 역동적인 흐름과 용틀임을 보이고 있고, 생동감 있는 미묘한 시어 운용과 이미지 구사 솜씨가 눈길을 끈다. ‘고매’는 단어와 조사 어느 하나 허투루 놓인 게 없을 만큼 간명과 절제가 돋보인다. ‘고매’는 모든 욕망을 초탈해 버린 한 선비를 표상하고 있다. 정신의 극점 혹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위의와 자존을 상기시킨다. 비록 나이가 들어서 성글고 거친 가지에다 꽃도 드믄드문 피어 있지만, 안으로 도사리고 있는 절조는 숙연하기까지 하다.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하다는 자기 연민과 자기 위안 그리고 그런 차원을 뛰어넘은 비장미가 돋보인다. 이렇듯 ‘고매’가 보여주고 있는‘정신의 어떤 드높은 경지’는 아무나 쉬이 이를 수 없는 도저한 세계다. 정갈하고 분별력 있게 살아온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고졸한 아우라가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는다.

초장 전구 ‘매화/ 늙은 등걸’과 중장 전구 ‘꽃도/ 드문드문’은 자수율로 따졌을 때 ‘2/4’구조다. 즉 각각 앞마디가 한 글자씩 줄어든 소음보다. 줄어들어서 더욱 간결한 맛을 내면서 단시조의 진미인 간명과 절제의 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고매’를 ‘고매’스럽게 하는 치밀한 미적 장치다.

‘고매’와 더불어 그의 또 하나의 명편 단시조 ‘석류’는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이라고 사랑하는 임에게 고백하고 싶은 속마음을 ‘석류’는 남김없이 담아내고 있다. 석류의 외적 이미지가 내적 이미지로 전이되면서 도치와 반복으로 의미를 증폭시킨다. 특히 고백의 정도가 충일한 시어인 ‘보소라’를 두 번 되풀이하여 호소력 있는 혼신의 고백에 이르게 한 점은 이 시편만이 가진 특장이다.

누가 ‘고매’와 같은 기품을 가진 인물인가를 찾아다니기보다는 ‘큰 바위 얼굴’처럼 자신이 그와 같은 품격을 지닐 수 있도록 힘쓸 일이다. 이정환 (시조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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