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逆天) / 이상화

이 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정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같은 바람은 길을 끄으려 바래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 지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우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가더니.// 그리하여 지금 내가 어데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 없이 사는 듯 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천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역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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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다. 비록 일제 식민치하이지만 가을엔 잠시나마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땅은 비록 빼앗겼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밤하늘을 맘껏 바라본다. 하늘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바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고 기쁨이다. 밤하늘엔 달과 별이 있어 좋다. 하늘조차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에선 달과 별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 달과 별이 어두운 하늘에서 빛을 발하듯이 땅에서도 일제를 몰아내고 빛을 찾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 달이 마중 나오고 별이 기다리지만 오늘밤엔 가고 싶거나 보고 싶지 않다. 암울한 현실을 잊고 살까 두렵다. ‘보배로운 가을철’ 청명한 밤에 ‘열푸른 유리로 천정’을 한, 저편 하늘이 복 지게 보인다. ‘햇살이 못 쪼이는 이 땅에서 나의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본’ 시인은 햇살 가득 쪼이는 땅에서 마음껏 웃어보고 싶다. 달과 별에게 줄달음질을 치고 싶다. 한편 현실을 외면하고 꿈속에 살까 두렵다. 환한 달과 반짝이는 별 그리고 실낱같은 한줄기 바람조차도 늘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에서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아픔이 가슴을 저민다. 엄혹한 현실과 아름다운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인의 모습이 처연하다. 자아와 비아의 괴리일 수 있다. 불러도 가지 못하고 생각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설움이 칡넝쿨처럼 얽혀 틀어진다. 역정이 불쑥 치솟는다. 하늘과 사람이 호응하지 못하고 서로 배반하는 암울한 식민지 상황은 하늘을 거스르는 죄악이다.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역천〉을 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선 일제 식민치하를 잘 알아야 한다. 일제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당시 시대상황에서 광복은 요원한 이상이자 꿈이었다. 달이 마중 나오고 별이 손짓을 하더라도 선뜻 달려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 시인의 처지가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암담한 상황이었다. 절망 중에 빛을 찾기 위해 날카로운 글을 날렸던 시인의 고귀한 정신이 〈역천〉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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