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의 개경으로 가는 행렬은 30리에 이르러 장관을 연출하고

▲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못이 바로 월지이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된 동궁과 월지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야경을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못이 바로 월지이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된 동궁과 월지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야경을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경순왕은 처음부터 나라를 지켜낼 의지를 잃었다. 신라는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를 고려에 의존해온 지 오래였다. 영토는 벌써 경산과 영천지역까지 축소되었고, 군사력과 경제력도 모두 바닥 수준이었다.

결국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백기를 들어 천 년 신라의 막을 내리는 치욕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 투항한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백성들의 피 흘림을 막기 위한 성군적 선택이었다는 엇갈리는 해석이 지금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는 외적의 침입으로 왕궁이 무너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문을 닫았다. 왕궁을 지키던 비밀결사대, 사천왕들은 왕이 투항하면서 할 일을 잃었다.

경순왕은 나라를 헌납한 대가로 서라벌이 아닌 개경에서 고려의 신하이지만 제2인자의 지위를 보장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서라벌, 전 신라 백성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왕의 선택으로 피 흘리지 않고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는 데 고마움을 품고 있던 백성들이 그의 죽음에 함께 오열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 동궁과 월지의 겨울 야경.
▲ 동궁과 월지의 겨울 야경.
◆삼국유사: 김부대왕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라벌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밖에까지 나와 영접하고 궁궐로 들어가 정성스럽게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와 태조도 눈물 흘렸다. 왕건은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칭찬하며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 경주시는 동궁과 월지 복원정비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동궁 복원 조감도.
▲ 경주시는 동궁과 월지 복원정비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동궁 복원 조감도.
이어 935년 경순왕은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태조는 글을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다. 경순왕이 뭇 신하를 데리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는데 찬란하게 장식된 마차가 30리에 길을 가득 메우고, 구경꾼이 담처럼 서 있었다.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다.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면서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산다고 하여 난세에 비유해 신란공주라고 고쳐 부르고, 시호를 효목이라 하였다. 또 정승의 자리에 앉혔는데 이는 태자보다 윗자리였고, 1천 석을 봉급으로 주었다. 따라온 신하들은 모두 쓰게 하였다.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공의 식읍지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땅을 바쳐 항복하러 올 때였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지금 왕께서 나라를 과인에게 주시니 그 베푸심이 큽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을 해 영원히 처남 매부로서 즐거움을 누리시지요.”

▲ 동궁과 월지 복원 조감도.
▲ 동궁과 월지 복원 조감도.
경순왕도 “나의 큰아버지 억렴에게 딸이 있는데 미모와 덕이 모두 훌륭하오. 그가 아니라면 궁궐 안 살림을 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았다. 곧 신성왕후 김씨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 주가 정승공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곧 헌숙황후이다. 그래서 정승공을 상보로 삼았다.

무인년(978)에 경순왕이 죽었다. 태조는 그를 상보로 책봉하며 글을 내렸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 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영명함으로는 세상을 초월할 만한 높은 기상을 떨쳤고, 문장으로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반열에 올랐다. 부는 춘추로 계속되었고, 귀는 봉토를 누렸다. 육도와 삼략이 가슴속에 들어 있고, 칠종과 오신을 손바닥에서 운용했다.

태조는 초년에 이웃 나라와 친목을 닦아 일찍이 그 분위기를 알았고, 때를 기다렸다가 부마의 혼인을 반포해 안으로 큰 절차를 이뤘다. 가국이 이미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에 합쳤다.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널리 전하고, 그 아름다운 풍채를 빛낼지어다.

그에게 상보 도성령의 호를 더하고, 이어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내린다. 훈작과 봉호는 예전과 같고, 식읍은 모두 1만 호로 정한다. 일을 맡은 이가 좋은 날을 골라 예식을 갖춰 책명하노니, 주무자는 시행하라.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월성 전경. 가운데 분지처럼 솟아 있는 숲지대가 월성이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월성 전경. 가운데 분지처럼 솟아 있는 숲지대가 월성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사천왕의 선택

천 년이나 이어져 오던 성을 지키는 사천왕들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경순왕이 왕궁을 비우고 개경으로 종살이를 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무엇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백수건달이 되어버렸다.

문무왕 이후 성의 사방을 지켜온 사대천왕들은 북문을 지키는 라다문천왕이 전체를 이끄는 리더역을 맡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북문의 천왕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유신검법과 명랑의 술법까지 고스란히 전수받은 후계자다.

▲ 동궁과 월지의 영역은 현재 복원된 구역에서 동쪽으로 확장되어 있다. 동쪽편 부지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됐다.
▲ 동궁과 월지의 영역은 현재 복원된 구역에서 동쪽으로 확장되어 있다. 동쪽편 부지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됐다.
동문을 사수하고 있는 라지국천왕은 음공의 귀재다. 비파를 뜯으며 웃음으로 적의 허를 찌르며 수하의 팔부신장들도 모두 악기를 무기로 삼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라증장천왕은 아주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있으며 큰 창과 칼을 무기로 쓴다. 병기들이 모두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 일반 장수들은 드는 것조차 버겁다. 적들은 그의 험상궂은 얼굴만 보아도 기가 죽는다.

서쪽의 수호신은 라광목천왕으로 술법을 잘 쓰는 도인이다. 이름에서처럼 부리부리한 큰 눈이 특징이다. 용, 호랑이, 늑대 등의 짐승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동서남북의 사대천왕들은 각자 여덟 명의 신장들을 거느리고 있다. 36명의 귀신같은 솜씨를 가진 무장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어 누구도 신라의 월성을 침입해 왕의 옷깃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들의 천하무적 힘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졌다.

라다문은 천왕들을 모아두고 “이제 우리의 임무는 소멸했다. 단지 경순왕이 고려왕을 만나기까지, 개경으로 입성하는 시간까지 궁을 대신해 왕의 신변을 지킨다”고 마지막 임무를 명하고 “그 이후는 각자가 원하는 길로 가면 될 것”이라며 홀연히 자리를 떴다.

▲ 월성을 1천 년이나 지켜온 비밀무사대를 상징하는 사천왕상.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사천왕상.
▲ 월성을 1천 년이나 지켜온 비밀무사대를 상징하는 사천왕상.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사천왕상.
사대천왕을 비롯한 팔부신장들은 대부분 첫 나들이가 마지막 나들이가 되어 천 년 궁성과 작별하게 되었다.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왕의 식솔은 물론 시중들과 6두품에 이르기까지 궁궐에서 나라의 일을 보던 신하들은 모두 그의 가족들을 대동해 하나에서 열까지 마차에 짐을 실어 북으로 항복의 행렬을 이었다.

여정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여인과 노인, 어린아이들이 지쳐 가끔 병치레를 하는 이외에는 조용하게 행군이 이어졌다. 경순왕조차 사대천왕이 숨은 그림자로 호위하며 따른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사대천왕의 일은 문무왕 이후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를 이어 라다문천왕이 이끄는 대로 오로지 왕궁을 사수하는 일만 수행할 뿐이었다.

일은 달구벌을 지날 때와 죽령을 넘을 때였다. 견훤의 사랑을 받았던 군사들이 후백제의 뜻을 저버리고 고려에 귀속하는 데 원한을 품고 살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척후병으로 전방 백리를 앞서가던 팔부신중들의 첩보를 받은 39명의 신장이 소리도 없이 200의 적군들을 잠재워 버렸다. 또 죽령에 숨어 복수의 칼을 갈던 김주원의 후손과 그를 따르는 50여 명의 날랜 검객들도 신장들의 바람 같은 솜씨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풀잎에 머리를 눕혔다.

▲ 신라 멸망 이후 왕궁터는 무너지고 지금 경주문화원 일대에 경주읍성을 쌓았다. 조선시대에 무너지고 남은 흔적을 복원한 동쪽성벽과 성문.
▲ 신라 멸망 이후 왕궁터는 무너지고 지금 경주문화원 일대에 경주읍성을 쌓았다. 조선시대에 무너지고 남은 흔적을 복원한 동쪽성벽과 성문.
개경에서 경순왕의 엎드린 모습을 일견한 라다문천왕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눈짓으로 천왕과 팔부신장들의 해산을 명했다. 이후 기림사에서 라지국천왕의 신장들이 비파를 뜯으며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드러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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