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패총

이지엽



하얗게 뼈만 남아 육탈된 시를 보러/ 백포만 주머니꼴 낮은 구릉 찾아 갔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조의를 표했지/ 이미 화석 되어 켜켜이 쌓인 퇴적층 속/ 긁개와 돌창 든 사내 뒷모습이 외로웠어/ 손들어 웃는 모습이 낯선 변방 같았어

고인돌과 독무덤 사이 흘러간 수세기를/ 정을 비운 몸만으로 층층 쌓아 막아선들/ 어찌 다 적을 수 있을까 원시의 숲 눈먼 책들/ 껍데기가 집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깡마른 음계의 바람 같은 말씀이여/ 논물이 그리운 봄날, 재두루미 입술 묻는

-『개화』, (목언예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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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작품집으로 『씨앗의 힘』 『해남에서 온 편지』 『초록 생명의 꿈』 등이 있다. 패총은 사람이 먹은 조개의 빈 조개껍질이 바닷가나 호숫가에 퇴적되어 있는 유적을 말한다. 조개무지, 조개무덤이라고도 부른다. 패총은 생활유적이기 때문에 조개껍질 이외에 토기, 석기도 출토되지만 조개껍질의 칼슘성분이 토양을 중화하여 유기 성분의 고고유물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사람의 뼈, 동물의 뼈, 골각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패총은 문자가 없었던 사회를 연구하는 사료로서 중요시 되고 있다. 화자는 백포만을 찾아가서 패총 앞에서 느낀 소회를 노래하고 있다. 그곳에는 시가 있고, 옛사람들의 그림자가, 말소리가, 눈웃음이 어른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세월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시대에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하다. 사내 뒷모습도 보고 원시의 숲 눈먼 책들도 바라보면서 이 시대의 삶을 잠시 반추할 수도 있겠다.

이 시조는 화법이 독특하다. 갔어, 표했지, 외로웠어, 같았어와 같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친근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보이는 것만을 그리고 있지 않고 상상력을 한껏 동원하여 여러 가지 장면들을 실감실정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시 속에서 자유자재로 활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

‘그리운 패총’은 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하얗게 뼈만 남아 육탈된 시를 보러 백포만 주머니꼴 낮은 구릉 찾아 가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조의를 표했지라는 첫 수가 청자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시각적으로도 두 눈에 쏙 들어오게 한다. 그곳은 이미 화석 되어 켜켜이 쌓인 퇴적층 속이기에 긁개와 돌창 든 사내 뒷모습이 외로웠고, 손들어 웃는 모습이 낯선 변방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인돌과 독무덤 사이 흘러간 수세기를 정을 비운 몸만으로 층층 쌓아 막아선들 어찌 다 적을 수 있을까 원시의 숲 눈먼 책들이라는 대목에서 상상력은 작동된다.

껍데기가 집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깡마른 음계의 바람 같은 말씀이여라고 속으로 가만히 외치면서 논물이 그리운 봄날, 재두루미 입술 묻는다는 장면의 제시로 끝맺고 있다. 비교적 긴 시에서 마무리가 묘하다. 흔히 끝부분에서 실패하는 시를 더러 보는데, ‘그리운 패총’은 끝줄이 미완의 문장이지만 시의 결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논물이 그리운 봄날, 재두루미가 입술을 묻을 때 봄을 맞은 이들은 살랑바람에 눈을 씻으며 카랑한 하늘을 우러를 것이다. 패총을 이루던 그 때 그 사람들처럼.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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