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나 물과 같은 땅은 없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땅을 공기나 물과 같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들겠다는 취지의 자막과 함께 촉촉하게 젖은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서울대교수와 부동산전문가의 인터뷰도 잇따랐다. 잠시 가슴이 먹먹하긴 했다. 실현가능성을 떠나 휴머니즘 물씬 풍기는 감상적 분위기가 잘 연출되었다. 땅은 생존하기위한 절대적 존재라는 점에서 공기나 물처럼 자유롭게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감성을 건드렸다. 치밀하게 기획된 홍보물임에 분명하다. 초등학생 때 생각이 났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땅의 소유가 정해져 있는 상황이 불합리했다. 동의나 계약한 적도 없었지만 땅은 구획되고 소유되고 있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기본적 생존조건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공기와 물과 땅이 없인 살 수 없다. 땅은 공기나 물과 같이 자연에서 주어진 것으로 어느 정도 변경은 가능하겠지만 노동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땅은 어느 특정 개인이 줄을 긋고 소유할 성질의 재화라 할 수 없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차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힘 센 사람이 빼앗는 것도 아니며 애초 자기 소유도 아닌 만큼 매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토끼나 멧돼지처럼 발이 가는 대로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자유가 인간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땅에서 먹이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은 천부적 권리다. 권리 이전의 권리다. 공기와 물과 땅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지와 무관하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다.’

어릴 땐 꽤 그럴듯한 생각이라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러한 생각이 철없는 공상이란 것을 깨닫고 망각 속에 묻어버렸다. 논리적 사고가 형성되고 세상물정을 알게 되면서 유치한 공상에 결함과 무리가 존재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원시시대엔 먹이를 찾아 이동했지만 농경생활을 하면서 살기 적합한 곳에 정착하였다. 정주지역에서 족당과 어울려 생활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갔던 까닭에 삶의 근거를 옮기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땅 위에 반영구적인 건물이나 구조물이 생겨났다. 따라서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남의 땅을 무단히 점유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기득의 땅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원하는 땅을 배타적으로 승계하는 방식은 자연스런 역사적 귀결이다.

공기나 물은 이동이 자유롭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사용해도 좋을 만큼 풍부하다. 희소성이 없어 경제재라기 보단 자유재에 가깝다. 가공된 물은 점차 경제재로 바뀌긴 했지만 비교적 저렴하여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공기도 급속히 오염되고 있어 경제재로 변할 날이 멀지 않다. 반면, 땅은 공기나 물과 비교할 수 없다. 거주 가능한 땅이 한정되어 있는데다 선호하는 땅은 경쟁이 치열하다. 생산이 불가능하여 늘릴 수도 없다. 위치가 고정되어 있어 옮길 수도 없다. 이제 땅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 특별한 재화로 독특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땅이 애초 공기나 물과 같은 생존의 기본조건이라는 측면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재화로서의 특성도 유별나다. 땅은 복합적인 중요한 소유대상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땅을 단순히 공기나 물과 같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해야하는 자연물로 보는 시각은 인간적이긴 하나 엉성하고 유치하다.

땅에 대한 원시적 낭만적 관점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결함과 허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지식이나 수준 높은 논리적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의심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잘 꾸미고 포장한 세련된 홍보물을 황금시간대에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은 과히 놀랄만하다. 정치적 의도를 가진 기획물이라는 의심을 지을 수 없다. 엘리트들이 종사하고 시청률에 목매는 방송국에서 아무런 생각이나 목적 없이 공연히 논란이 일 영상물을 제작하지 않을뿐더러 광고수입에 의존해야하는 민영방송이 광고와 거리가 먼 기획물을 무단히 자발적으로 만들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코 우연히 불거진 일이 아니다. 개인 의견이라는 했지만 장관이 토지국유화를 언급한 지난일이 떠올라 더욱 불길하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지향하고 ‘소득주도성장’을 앞세워 공산주의로 간다는 의심이 만연한 상황에서 파급력이 큰 방송에서 대놓고 버젓이 자행한 일이라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표를 계산했을 것이다. 땅 없는 사람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 그리고 말만 번지러한 강남좌파를 아우른다면 폭발력이 있다고 예상했음직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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