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 BC18년에 위례성에서 나라 열어 660년 사비성에서 막내려||성왕 사비성으로 천도해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러나 백제를 234년부터 286년까지 52년이나 다스렸던 8대 고이왕을 사실적인 시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의 역사서 주서에서 백제의 시조를 고이왕으로 보는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이와 함께 고이왕이 백제의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강화시킨 업적이 그를 시조로 모시게 한다.
백제시대를 연 사람들을 온조, 고이왕, 근초고왕, 근수구왕, 개로왕 등으로 본다. 이어 백제중흥기에 이어 멸망에 이른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30대 무왕, 31대 의자왕이 역사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령왕은 무녕왕으로 표기되며 501년부터 523년까지 25대 백제왕으로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해양으로 멀리까지 진출해 백제의 위상을 크게 높인 왕이다. 최근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학계 연구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무녕왕의 아들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백제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백제는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시작해 백마강 일대 사비성에서 678년 역사의 문을 내린다. 31대 의자왕의 굴욕, 삼천궁녀의 낙화암 전설과 함께 비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이다.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 26년은 무오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지명은 소부리이고,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라는 것은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여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부여군 서쪽 자복사의 높은 자리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여주 공덕대사가 수놓은 휘장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 ‘후한서에 삼한이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北史)에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와 닿아 있고,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한강에 닿았다고 한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 한다. 고마성이라 하는 이도 있다. 그밖에 또 오방성이 있다.
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그 왕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고 전한다.
신당서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를 경계삼고, 남쪽에는 왜국이 있는데, 모두 바다 건너서이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기의 본기는 백제 시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들이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BC 18)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되돌아 왔다. 나라이름을 고쳐 백제라 했다.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를 성씨로 삼았다.
14년은 병진년(BC 5)인데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37)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얻고 북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이 즉위한 원휘 3년은 을묘년(475)인데, 도읍을 웅천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제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했다.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백제는 BC 18년 온조가 창건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678년간 한반도에서 삼국의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특별한 문화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현대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도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까지 일본 등지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백제는 26대 성왕이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한 것을 포함해 다섯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 처음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백마강 유역의 시대로 크게 나누어 지지만 성왕은 사비성으로 천도해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고, 중국 양나라와의 교류에 이어 일본과의 교류도 두텁게 펼치며 나라의 힘을 키웠다.
성왕은 아들 창을 앞세워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펼쳤다. 이미 기세가 오른 신라를 백제는 당하지 못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음에 이르렀다. 아들 창 또한 왜나라에서 온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했지만 백제는 크게 패했다.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크게 분노했다. 아들 창에게 왕좌를 넘기고 거짓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도움을 청하러 왜나라로 달려갔다. 성왕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 아들 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승려 100명을 선발해 3년간 위로법회를 열게 했다. 겉으로는 승려들의 법회였지만 이들은 전쟁을 치를 무서운 장수를 키우는 훈련원이었다.
성왕의 길은 멀고 험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백제와 가까웠던 소가시 세력이 모노노베시 세력에 밀려 지원할 여력을 잃었다. 가까스로 성왕의 지원으로 소가시 세력이 3년이 지나 겨우 모노노베시 세력을 몰아내고 후쿠오카지역의 실력자로 자리를 회복했다. 이어 백제를 지원해 1천여 명의 군사를 신라로 보냈지만 이미 성왕은 병으로 사망하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다시 군사를 일으킬 힘이 없었다. 결국 성왕은 재기에 실패하고 이역만리 왜나라에서 눈을 뜬 채 세상을 하직했다.
성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위덕왕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 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신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무왕시대로 이어지는 제2의 부흥기를 마련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