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출지

K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쥐띠 해이고 하니 연초에, 경주 서출지를 대구일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었다. 좋은 제안이어서 나도 무자생 쥐띠라며 웃었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는, 글이 나온 못이 아닌 쥐가 나온 서출지(鼠出池)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심 기이했다. 인터넷을 뒤적여 1500여 년 전 소지 마립간이 다스리는 신라 땅을 살폈다.

봄날이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었다. 바람도 쐬고 민심도 살필 겸 왕은 시종과 일관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동했다. 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올라 수심을 달래고 싶었다. 고구려와 말갈의 잦은 침략도 문제였지만 왕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궁내까지 손길을 뻗친 불교의 잠입에 대한 전통 토속 신앙의 보이지 않는 반발, 그로 인한 갈등이었다. 묵호자가 전래한 부처의 가르침은 일선군 모례의 집에 굴실을 만들어 아도화상을 모시는 등 민심에 스며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왕실의 구병(救病)활동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날로 조정 깊숙이 그 세를 얻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월성신의 운행을 점쳐 왕위를 보필하던 뿌리 깊은 토속 신앙의 세력이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교의 전파를 금하던 조정이고 보면 토속 신앙에 대한 위협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신라 21대 소지왕(毗處王) 즉위 10년 무진(戊辰)년의 일이었다. 천천정으로 거동하는 왕의 행렬을 앞뒤로 날아들며 까마귀가 까옥 까옥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이 행렬을 멈추고 까마귀의 심상찮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소서” 쥐가 두 손을 모으고 사람의 말로 왕에게 아뢰었다. 까마귀를 뒤따르는 왕의 행렬이 천천정 남쪽 피촌(避村)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돼지 두 마리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돼지의 싸움을 지켜보던 왕의 행렬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라진 까마귀의 행방을 찾아 피촌 주변을 배회하는데 한 늙은이가 연못 가운데서 서찰을 들고 홀연히 솟아올랐다. 늙은이의 서찰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오히려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이에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개봉을 명한 서찰에는 ‘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활로 쏘자 피가 흘러나왔다.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승려(焚修僧)와 궁주(宮主)가 금갑 속에 숨어서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출지(書出池)는 글(서찰)이 나온 못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가 서(鼠)출지인 것은 까마귀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통역하는 쥐의 이미지가 남달라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출지를 찾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쥐들을 불러내었다. “너는 쥐들의 활동이 왕성한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니 잘 살게 될 거야” 어머니는 자주 쥐를 앞세워 어린 내게 먼 앞날을 축복해 주곤 하셨다. “천석! 천석!” 아버지는 쥐에 물린 손가락을 치켜들고 천석을 외치셨다. 쥐에 물리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러주신 쥐와는 달리 내가 만난 쥐는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기도 했다. 낯 선 도시 허름한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었다. 싱크대 물관을 타고 침입한 쥐들은 밤마다 거실 구석을 눈에 불을 켜고 뒤적이곤 했다. 빗자루를 들고 쫓으려 해도 나를 쏘아보는 쥐의 악착같은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사적 제138호, 경주 서출지 (慶州 書出池)는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연못이다. 겨울바람이 불어서 을씨년스러웠고 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서출지를 가득 매운 연꽃 군단도, 못가의 배롱나무도, 독야청청한 소나무 밑 벤치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任勣)이지었다는 이요당(二樂堂)도 마찬가지였다. 회색 풍경 속에 부스스한 몸을 움츠리고 스산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

문화유적이란 당대 역사가 숨 쉬는 현장이며 세월의 침식을 비껴서는 상징의 육체이다. 왜 임금의 가마는 심산유곡이 아닌 못가의 천천정(天泉亭), 하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를 향했을까? 왜 사금갑 설화를 만든 사람은 하늘 샘, 맑은 못으로 그 배경을 설정했을까? 맑은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성찰의 거울이니까 그러했을 것이다. 거개의 설화가 그러하듯이 서출지 전설 또한 우화(寓話)이다. 우화란 세상을 비추는 반성의 거울, 가장 직접적인 인간사의 알레고리이다. 서출지 전설에 비친 당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세월을 거슬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승려는 궁주와 간통을 범하고, 왕을 시해하려 함으로써 왕권에 도전한다. 이에 맞서 쥐, 까마귀, 돼지, 그리고 신령한 노인 등은 왕권을 수호한다. 일관은 왕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관(日官)은 고대 사회에서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으로, 전통적인 규범과 의례를 현실 정치 영역에 반영하는 존재였다. 승려와의 간통은 궁중 세력과 불교 세력 간의 야합을 뜻한다. 사금갑 설화는 궁중 불교 세력과 일관으로 대변되는 토속 신앙 세력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의 반영으로 읽힌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 벤치에 앉아 신라적 서출지의 그날을 떠올려 본다.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전하고, 쥐는 까마귀의 울음을 인간의 말로 번역해서 들려주고, 돼지는 왕의 행렬을 못가에 세워 신령한 늙은이의 서찰을 받게 한다. 그날의 까마귀와 쥐와 돼지와 신령한 노인을 만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신령스러운 그들은 2020년 오늘의 궁핍한 세태에 대해 어떤 지혜로운 이야기를 전해줄지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다.

갈등 없는 시대, 대립 없는 사회는 없다. 대립과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과 목적, 그 성격과 가치의 문제이다.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향한 것일 때 갈등과 대립은 발전의 동력이지만, 공화를 등져버린 패거리의 배타적 이해에 얽매인 것이라면 그것은 공동체 파국의 원인이 된다. 끼리끼리 똘똘뭉쳐 저 잘났다 큰소리치는 진영 간의 이전구투, 국론분열의 소모적 멱살잡이가 끝날 줄 모르는 지금/여기/우리에게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인 서찰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까마귀가 전하는 하늘의 대답을 쥐가 통역해서 들려주면 좋겠다.

한 사람을 위해 두 사람을 죽인다는 것,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 받은 민주사회의 통치자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던 고대사회의 임금과는 그 처지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전자가 상대적 가치라면 후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서출지 전설에 비추어 보건대 우화로서 사금갑 설화는 공동체(국가)에 해악을 가져오는 존재를 무찌르는 구조의 반영이다. 두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승려의 간통이라는 행위로서 상징되는 질서의 파괴 혹은 혼돈에 대한 질서와 정의, 공동체의 수호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올해는 경자년 육십간지의 37번째 해, 경(庚)은 백(白)이므로 하얀 쥐의 해라고 한다. 검은 쥐가 아닌 하얀 쥐, 무언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가져본다. 1년에 다섯 차례, 한 번에 10여 마리의 새끼를 낳는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쥐는 다산의 상징이고, 미륵에게 부싯돌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세상의 모든 뒤주를 가져도 좋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함경도 지방의 전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쥐는 재물과 풍요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일과 지진 등 지각변동을 미리 알아차리고 남 먼저 피난 가는 예지력에서 보듯 쥐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까뮈의 〈페스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베르베르의 장편 〈고양이〉에서와 같이 문학작품의 주요 인물로 쥐가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는 캐릭터, 지혜를 상징하는 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사는 경제문제도, 죽고 사는 안보문제도, 끝없이 으르렁거리는 편싸움 문제도, 법과 정의와 공정 문제도,,,,,,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경자년!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하얀 쥐의 지혜가 그리운 시절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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