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좋은 날

이재무​

볕 좋은 날 /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주리 /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 부은 발등을 /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 잠시 잠깐 눈을 주리 / 발톱을 깎는 동안 / 말은 아끼리 /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 그윽하게 바라다보리 / 볕 좋은 날 /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주리

『데스밸리에서 죽다』 (천년의시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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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좋은 날은 겨울날일 수 있고 때 이른 봄날일 수도 있다. 적어도 찌는 듯한 여름날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따스한 아랫목이 그립고 태양이 사랑스러워지는 그런 날이다. 햇살이 시각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햇볕은 따스한 온기와 부드러운 촉감이 한결 더 느껴지는 말이다. 서정적 분위기를 깔아보려 한다든가 낭만적 정취를 느껴보려는 장치는 아니다. 따뜻한 마음씨와 가식 없는 진솔한 마음가짐이 ‘볕’속에 은근히 녹아있다. 남쪽으로 난 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거실에 길게 누운 날이다. 사랑하는 이와 거실 마룻바닥에 앉아 햇볕을 즐긴다. 어린 시절 양지 바른 벽에 기대어 ‘며르치야! 꽁치야!’하며 햇볕을 다투며 놀던 때가 생각난다.

사랑하는 이가 햇볕을 보듬고 앉아 손톱을 깎는다. 나름대로 할 일을 마친 손톱이 톡톡 잘려나간다. 잘려나간 손톱 조각이 고요하고 아늑한 거실에 누워 은은한 햇살에 반짝인다. 다음은 발톱 차례다. 양말을 벗고 발을 드러낸다. 고왔던 살결이 수분이 빠져 건조하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뒤꿈치가 서럽다. 손톱깎이를 받아든다. 발톱의 윤곽이 흐리다. 벌써 돋보기를 써야 하는 나이다. 거친 발이 더욱 적나라하다. 부은 발등과 찌부러진 발톱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다. 지난 시절의 험한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기꺼이 희생하고 침묵하는 발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마음이 짠하다.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젊은 날의 치기어린 호언이 새삼 부끄럽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발을 매만져주며 지난날들을 참회한다.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애무하듯이 살며시 다독인다. 알뜰한 살림살이가 묻어있고 살뜰한 보살핌이 비쳐진다. 괜스레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걸핏하면 눈물이 난다. 주책이다. 무심한 햇살이 뜨락에 쏟아진다. 눈물을 참으려니 가슴이 먹먹하다. 말을 할 수 없다. 발톱을 깎는 동안만이라도 머리를 숙이고 말을 아낀다. 말은 진실을 숨기기 위한 수단인가. 눈을 들어 그대 이마에 드리운 그늘을 바라본다. 살아오면서 아직도 근심과 걱정을 끼치는 삶이 원망스럽다. 인생이 고해라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날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잠시나마 세파를 잊고 감사하는 마음과 늦깎이 사랑을 전하고 싶다. 순간 이심전심인지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잔잔한 미소가 언뜻 묻어난다. 발톱을 깎듯이 사랑하는 이의 근심과 걱정을 잘라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체 유심조.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면 어떤가. 서로 감사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게 행복인 거지.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하다. 진솔한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지는 서정시다. ​시인의 ‘58년 개띠를 위한 찬가’가 작으나마 위안으로 다가온다. “친구여, 노래 한 곡 들으시게나 / 나무가 피우는 꽃은 모두가 젊다네 / 고목이 피운 꽃으로도 벌과 나비는 날아든다네 /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그늘처럼 / 우리는 날마다 생의 부활을 살아가세나.”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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