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감옥

권갑하

나무는 제자리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온몸으로 써 올린 구름 같은 상념들/ 과녁은 늘 밖이 아닌 내 안을 겨냥했다

수없이 맴돌던 자리 나이테로 굳어지고/ 넓어지는 마음만큼 그늘은 살이 쪘다

새들의 날갯짓 속에 막힌 하늘 뚫리고/ 절절한 그리움에 별을 바라 눈을 뜨는/ 푸른 감옥의 어린 수인이 되고 싶다/ 한 생을 발목 잡혀도 신명으로 춤을 추는

-『열린시학』(2019, 여름호)

........................................................................................................................

권갑하는 경북 문경 출생으로 1992년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작품집으로『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 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세한의 저녁』『외등의 시간』『겨울 발해』등이 있다. 창작과 더불어 시조문학의 저변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시인이다. 특히 역사의식의 발현과 천착에 남다른 공력을 쏟고 있다.

‘푸른 감옥’은 나무에 대한 사유의 표상이다. ‘나무는 제자리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라는 표현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나무는 온몸으로 써 올린 구름 같은 상념들을 품고 과녁은 늘 밖이 아닌 내 안을 겨냥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수없이 맴돌던 자리가 나이테로 굳어지고 넓어지는 마음만큼 그늘은 살이 쪘다. 하여 가끔 찾아오는 새들의 날갯짓 속에 막힌 하늘이 뚫리고 절절한 그리움에 ‘별을 바라 눈을 뜨는 푸른 감옥의 어린 수인이 되고 싶다’ 라는 소박한 바람은 설득력을 가진다.

한 생을 발목 잡혀도 신명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나무는 비록 제자리걸음을 걸을지라도 무한대의 상상력을 가진 존귀한 생명체다. 푸른 목숨의 삶은 이렇듯 웅숭깊다. ‘푸른 감옥’은 감옥이어도 결코 감옥이 아닌 것을 시인은 시로서 잘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가 단시조 ‘봄비’에서 봄이 와서 비가 내리는 날 냉동실 토종 가물치가 꿈틀거리며 꼬리를 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꽁꽁 얼어붙은 힘 좋은 가물치가 극적으로 재생하고 있는 장면이다. 봄이기 때문에, 봄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 년 전 눈감은 홍련이 별안간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리는 정경도 보여준다. 이미 목숨을 다한 지가 천 년이나 되었는데도 다시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 봄이 와서, 봄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렇게 미치는 것이고 미쳐 팡팡 터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혀 과장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쓴 ‘연을 띄우다’는 발해를 찾아서 쓴 시인데 광활한 발해의 하늘 위로 장백의 안개 헤치고 압록강과 두만강도 훌쩍 넘어 적층된 연대 속으로 연을 띄워 올리며 여기가 어디인가 굽어보고 돌아보며 주름진 오욕의 역사와 해진 상흔도 다독이며 가끔은 천둥 번개를 불러 곤한 잠도 깨우고 있다. 너무 높게는 말고 낮게는 더욱 말고 연바람 멈추면 노래도 멎고 말 것이기에 얼레를 팽팽히 풀었다가 다시 당긴다. 우리 어버이들이 온몸으로 일군 모토이기에 다물 그, 돛을 올리듯 꼬리 긴 연을 띄운다. 다물은 되찾다, 라는 뜻으로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연호이자 건국이념이다. 발해유적지에서 연을 하늘 높이 띄워 올리며 역사 회복을 꿈꾼다.

그는 나무를 통해 생명을 예찬하면서 역사에 대한 부단한 탐구와 천착으로 새 시대를 꿈꾼다. 의미 있는 작업이다. 고토 회복의 그날은 아득하지만 꿈꾸는 일을 등한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륙을 말 달리던 선조들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각자 마음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 힘썼으면 한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