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석

살가죽 다 헐어서/ 만들어진 쇠가죽 북,/ 냉이꽃 밟았던 일,/ 어린 풀잎 먹었던 일,

얼마나 미안했으면/ 북소리로 갚아줄까.

-『한국동시조』(2020,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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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은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5년 현대시조로 등단한 이후 작품집으로 『받아쓰기』『이중창문을 굳게 닫고』『사랑엽서』『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와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등이 있다.

‘북’은 동시조다.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오랜 사색 끝에 태어난 시다. 동시에는 여러 가지 덕목이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장 앞서서 배려할 점은 단순미다. 단순함 속에 얼마든지 깊이를 담을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교훈에 붙들리거나 오늘날 어린이의 생각이나 수준을 너무 낮춘 표현을 하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벗어나게 된다. 단순히 어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거나 그 시절의 추억담을 담는 일은 동시조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오늘의 어린이가 온몸으로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생활, 고민거리, 놀이 등에서 동시조의 소재를 찾아야 한다.

‘북’은 군더더기가 없다. 짧지만 적확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깊이 있는 삶의 이야기가 꽃향기처럼 번져난다. 살아 있을 때 소가 몇 가지 행한 일을 소가 스스로 화자가 되어 노래하고 있다. 살가죽을 다 헐어서 쇠가죽 북은 만들어졌다. 소는 자신의 몸 전체를 사람을 위해 바친 셈이다. 소는 봄 날에 냉이꽃을 밟았던 일을 기억한다. 어린 풀잎을 맛있게 먹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뿐이겠는가. 소는 육중한 몸으로, 힘센 다리와 발로 살아가기 위해 횡포 아닌 횡포를 일삼았던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몹시도 미안했던 소는 자신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도록 하였고, 마침내 북소리로 그 모든 미안함을 갚는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북’은 일견 단순하게 읽히지만 참신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어서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의 다른 동시조 ‘사과를 먹으며’의 둘째 수를 한번 보자.

사과를 한 입 물면/ 내 입의 이빨자국/ 으르렁댄 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무리/ 물고 뜯어도/ 아프다고 말 안 한다.

사과를 통째로 먹으면 잇자국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으르렁댄 흔적으로 읽고 있다. 새로운 발견이다. 아무리 물고 뜯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사과에로부터 우리는 어떤 다른 정황을 떠올리게 된다. 시적 은유를 통해서 주독자인 어린이들이 은연중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사과를 먹으며’는 그런 의도를 이면에 깔고 있다. ‘북’과 더불어 읽으면 읽는 맛을 더해줄 것이다.

봄이 완연하다. 바야흐로 살구꽃이 절정이다. 봄이 오면 생각나는 동시조가 한 편 있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정완영 선생이 남긴 ‘분이네 살구나무’다.

동네서 젤 작은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언제 읽어도 좋다. 자연스러운 가락에 실려 흥겹기 이를 데 없다. 대비의 묘미를 잘 살렸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네에서 제일 작은집이 분이네 오막살이인데 동네에서 제일 큰 나무가 분이네 살구나무다. 그런데 그 살구나무가 밤사이에 활짝 피어올라 대궐보다 더 덩그렇게 보이니, 마음이 부자라는 말이 실감날 만하다. 집은 비록 작아도 살구나무가 제일 우람하니 그 집 아이인 분이는 어깨를 쫙 펴고 자랑할 만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서 공감을 안겨준다.

임영석의 동시조 ‘북’은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널리 읽어 주고 싶은 작품이다.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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