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대구는 살아있다

발행일 2020-04-07 14:21: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대구에서 한 의료인이 코로나19로 숭고하게 희생되었다. 경산에서 내과를 개원한 고 허영구 원장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경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에 별세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자신의 직분에 성실한 분이었다. 남들이 꺼려하는 코로나19 의심환자를 기꺼이 받아서 진료하다가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많은 동료 의료인과 시민들이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다. 하느님도 무심하다. 그분의 급한 부름에 먼저 가신 거라고 굳이 자위해본다. 대구의료인들은 동료의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 환자가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역병과 맞서겠다고 다짐했다. 사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대구가 코로나19의 소굴로 알려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 대구의 품격이 손상된 바 있다. ‘대구 봉쇄’, ‘대구 손절’이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대구시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역병과 싸웠다.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감염으로 인해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된 사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슈퍼전파자의 신상을 털거나 특정 세력을 희생양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고의가 없고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을 모두 피해자로 포용했다. ‘세월호 사건’에서 세모와 유병언 일가, 심지어 대통령과 집권세력까지 희생양으로 몰아 거나하게 살풀이한 일과 비교하면 대구시민은 위대한 바보다. 모두 ‘내 탓이오’라며 ‘바보들의 행진’을 선두에서 이끈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미국 ABC방송 기자는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고요함만 있다”는 말로 대구 상황을 묘사했다. 역병이 도는 도시는 살벌하다. 페스트가 덮친 ‘오랑’은 지옥을 방불했다. 감염에 대한 서로 간 의심이 불신의 삭막한 유령도시로 만들었다.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모두 미쳐갔다. 최초의 코로나 발원지 중국 우한도 그러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구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구는 달랐다. 탈출이나 사재기는 없었다. 탈출 대신 대구에 오지 말라며 스스로 격리했고, 사재기는커녕 병원이나 보건소에 생필품을 보냈다.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다. 불요불급한 외출을 최대한 줄였다. 의료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진료에 나섰고, 감염의심환자들은 질서 있게 행동했다. 경증 환자는 중증 환자에게 병실을 양보하는 의연함을 보여줬다. 자신의 안위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먼저 생각했다. 임대료를 내리거나 유예하는 '착한 건물주 운동'도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언론도 대구를 품격 높은 도시로 칭송했다.

대구의 품격은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된 건 아니다. 대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운 곳이다. 임진왜란 때, 대구 유림 집안들이 ‘팔공산회맹’을 조직하여 왜병에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구한말, 나라의 빚이 많아 망할 지경에 이르자 국채를 갚자고 조막손을 모았다. 남자는 술과 담배를 끊어 아낀 돈을 내놓았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벗었다. 국채보상운동이 그것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화운동도 대구에서 불붙었다. 6·25 땐, 낙동강 방어선을 마지노선으로 삼아, 목숨 걸고 싸운 끝에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대구는 인재의 보고이기도 하다. 단군 이래 오천년 동안 떨치지 못했던 가난을 시원히 해결해준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 경제대국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해낸 기업, 삼성이 첫 사업을 시작한 곳도 대구다.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이건희 회장 또한 대구 태생이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큰 별, 위대한 큰 바보 김수환 추기경도 대구 출신이다. 그 이외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대구의 기를 받았다. 대구와 대구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빈말이 아니라, 긴 역사와 빛난 전통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일상을 빼앗아가고 봄을 막아섰던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는 듯하다. 하지만 뒤늦게 다른 나라에서 그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라 경계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된다. 활짝 핀 봄꽃에 정신이 팔려 뒷마무리에 소홀하면 세력을 회복한 역병이 더욱 강력한 힘으로 덮쳐올 수 있다. 마지막 환자가 완치되는 그 날까지 냉정하게 대응함으로써 대구의 품격을 지켜내야 한다. 대구는 살아있다. 대구의료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의인 고 허영구 원장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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