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0∼24)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었으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레바논의 빈민가에서 출생기록조차 없는 12살짜리 자인이라는 한 소년이 동네 아이로부터 빼앗은 스케이트보드 위에 커다란 냄비를 묶어놓고 그 안에 한 살짜리 요나스라는 어린아이를 태워 다닌다. 자인이 요나스를 안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거워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유모차인 셈이다.

요나스의 엄마는 불법체류자로 구금되어 교도소에 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인은 요나스를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12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요나스를 태운 냄비는 덜커덩 털털거리며 시장바닥을 헤매다니고 어른들은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두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인과 요나스 같은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진 레바논의 풍경이다.

레바논에서 빈곤과 버려진 아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5년간 이어진 종교전쟁인 레바논의 내전은 최대 23만 명의 사망자와 약 35만 명의 난민을 양산했으며, 수많은 고아가 거리의 아이들이 되었으니 자인과 요나스는 35만 명 중의 한 명인 셈이다.

자인은 아이가 많고 가난한 집의 맏이인데 어느 날 여동생 사하르가 초경을 하면서 집주인에게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간다. 11살이었던 사하르는 임신을 하고 결국 하혈로 숨지고 마는데 그걸 안 자인이 사하르의 남편을 칼로 찔러 버린다. 법정에 선 사하르의 남편은 그녀가 결혼이 뭔지나 알 나이였는지를 묻는 변호사에게 “이미 꽃이 피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조혼풍습이 만연한 이슬람에서는 여자 아동의 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딸이 초경을 하면 팔다시피 결혼시켜 버리는데 그들도 그걸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자인은 법정에서 사하르의 남편에게 말한다. “사하르가 감자냐? 아님 토마토인가? 꽃이 피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레바논 빈민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인간의 정의에 대해 물음을 묻게 한다. 자인의 부모, 이웃들은 지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이지만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정의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버나움은 예수의 예언처럼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영화 속의 가버나움, 레바논 빈민가는 멸망하지 않고 존속되리라고 믿는다. 소돔에는 롯이 있었듯이 가버나움에는 자인 같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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