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59) 불교의 전래

발행일 2020-04-20 09:25:2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고구려인 아도화상은 중국에서 불법 공부, 신라에 전해 불교문화 꽃피웠다

구미시 해평면에 위치한 도리사에 불상처럼 조각되어 야외에 안치되어 있는 아도화상. 아도화상은 고구려 스님으로 어머니는 고구려의 고도녕, 아버지는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위나라 현창화상 밑에서 수학해 고구려로 돌아와 어머니의 권유로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
우리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교육한다. 그러나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가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더러 시선을 끌기도 한다.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수긍이 가기도 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

오늘날 불교가 민중 속 깊숙이 퍼진 것과 다르게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이후 원효대사가 주장한 소승불교가 일반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는 본격적으로 백성들에게 전파되면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또 건축, 조각,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화예술로 승화되었다.

아도화상이 전해 출발한 신라에서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발전하면서 화랑정신과 결합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근원이 되어 국민들에게 국가적 이념으로 승화했다.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고, 화려하게 불교문화로 꽃피운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써본다.

도리사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이다. 야은 길재, 운봉성수, 성철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태조선원 편액은 오세창 선생의 글씨다. 오른쪽의 작은 건물이 극락전이다.
◆삼국유사: 불교의 전래

-순도가 고구려에 오다

고구려 본기에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374)에 아도가 진나라에서 왔다. 다음해 2월에 초문사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를 짓고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전에서 “두 사람이 위나라에서 왔다”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실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말하기를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한 것도 잘못이다.

고구려시대 안시성, 다른 이름으로 안정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요수는 다른 이름으로 압록이고,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어찌 개성의 흥국사를 이르는 것이겠는가.

일연선사는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이라고 읊었다.

도리사 극락전은 조선시대 건축물로 1996년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의 정육면체를 연상케 하는 날렵한 모습이다.
-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

백제 본기에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 예의를 갖추어 궁중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다음해에 도읍지인 한산주에 절을 짓고 승려 열 사람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이것이 백제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이라 적고 있다.

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392) 2월에 불교를 잘 믿어 복을 얻도록 하였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이다.

일연선사는 “천운이 창조되던 처음에는/ 대체 쉬웁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늙은이는 춤과 노래에 실어 절로 풀고/ 옆 사람까지 이끌어 눈뜨게 했다”고 읊었다.

극락전 바로 앞에 세워진 전탑 형식의 이형석탑이다. 기단이 길게 다듬은 돌을 기둥처럼 세웠고, 탑신 부분은 작은 석재를 중첩해 벽돌 쌓듯이 얽거나 짜서 조성했다. 보물 제47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놓다

신라 본기는 “제19대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으로 왔다. 그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잘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옷과 향기나는 물건들을 내려주었다.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일 데를 알지 못해,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온 나라를 돌며 물어보라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더니만 이는 향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정성을 신성에게 알리는 것이오. 만약 이것을 태워 소원을 빌면 영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고 적었다.

때마침 왕의 딸이 병석에 눕자 사람을 시켜 묵호자를 불러왔다. 향을 태우며 빌자 딸의 병이 곧장 나았다. 왕은 기뻐하며 많은 상을 내리려 하는데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화상이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왔다.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한데 여러 해를 머물다 병 없이 죽었다. 같이 왔던 세 사람은 머물며 경문과 율법을 가르쳤는데 더러더러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

도리사 석종기에 석적사터에 있던 탑에서 발견된 사리와 금함을 도리사에 옮겨 석재 돌모양의 사리탑으로 조성했다. 1977년 도굴 당해 흩어져 있던 사리탑을 복원하던 중 국보 제208호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금동사리함의 진신사리 1과는 세존사리탑에 옮겨 안치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

아도의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으로 이름은 고도령이다. 고도령은 평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을 경영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아굴마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 식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도령과 가까워지게 되어 아도를 낳았다.

고도령은 아도가 12살이 되자 “네 아버지는 중국의 대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다. 중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공부를 하라”고 일러 보냈다.

아도가 중국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도의 아버지는 궁궐에서 재상의 지위에 올라 황제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아들을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황제는 아도를 아껴 곁에 두고 3년이나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공부하게 했다.

모례의 집으로 피난해 있던 아도화상이 좌선하던 바위라 하여 아도화상 좌선대로 부르는 펀적한 바위, 뒤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아도화상 사적비와 도리사에 불량답을 시사한 지주내용을 기록한 시주질비가 있다.
아굴마는 15살이 된 아도를 공부가 깊은 현창스님에게 보내 불법에 대해 철저하게 배우도록 했다. 아도는 재치가 있었다. 궁중에서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며 많은 공부를 빠르게 습득한 데 힘입어 불법에 대한 이해도 습자지에 먹물 스며들듯 빨아들였다.

아도의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는 남달랐다. 현창스님과의 일문일답식 공부에서 세상의 이치를 막힘없이 풀어내며 민중들의 고뇌를 해소해 줄 수 있는 답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아도가 20세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신라 미추왕의 성국공주를 소개해주며 신라로 돌아가는 길 안내를 맡으라 일렀다. 이어 황제는 현창스님이 아도에게 부탁한 것과 같이 신라에 불법을 먼저 전하라고 당부했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좌선하는 곳에 한겨울에도 도화, 이화가 활짝피어 있어 절을 지으며 붙인 사명이다. 도리사 입구에 유난히 붉게 핀 도화.
아도는 성국공주를 호위해 신라까지 무사히 들어와 미추왕을 만났다. 미추왕은 공주를 안내해 온 아도의 인품과 늠름한 모습에 이끌려 궁궐에 머물게 했지만 생소한 불교에 대해서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용하다는 무당과 의사들도 고치지를 못하자 미추왕이 전국에 방을 내려 공주의 병을 고쳐주면 후한 상을 줄 것이라 했다. 이에 아도가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려 공주의 병을 깨끗하게 고쳤다.

도리사로 진입하는 한참 앞에 세워진 산문.
왕이 크게 기뻐하며 아도화상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도화상은 절을 지어 불법을 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이에 왕은 궁궐 서쪽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어 아도가 관장하게 했다.

미추왕이 죽은 다음 대신들이 요상한 주문을 외운다며 아도를 몰아내었다. 아도는 이때 이미 세상에 대한 이치를 모두 터득하고, 술법을 익히고 있었지만 술법을 세상에 드러내어 펼쳐보이지는 않았다.

아도화상은 이들을 피해 속림 모록의 집에서 절을 짓고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도가 절을 짓고 신라 서민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 도화와 이화가 만발한 땅이어서 사람들은 절 이름을 도리사라 불렀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도리사의 적멸보궁은 통도사, 상원사, 봉정암, 법흥사, 정암사, 건봉사, 용연사와 더불어 한국의 8대 적멸보궁으로 손꼽히는 불교의 성지다.
아도화상은 이미 속세의 정리에서 벗어나 달관한 도사로 깨달음을 터득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끈질기게 그를 추격해오자 아도화상은 자신이 지은 도리사의 지하 석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면벽 수행하다가 그 자리에서 입적했다. 그의 앞에는 인연이 닿는 후세에 다시 오리라는 글을 남겨두고, 편안히 잠든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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