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된 것 속의 일어남, 이름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음양오행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한글 이름이 유행하고 더 이상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이름을 짓지 않게 되면서 타인에게 놀림감이 되거나 부르기에 이상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역으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이름을 찾기도 하니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하나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며 기호이기도 하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읊음으로써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 꽃은 수많은 꽃 가운데 하나의 흔들림, 몸짓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가 꽃의 이름을 불러주자 꽃은 비로소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과 치히로는 이명동인이다. 제3의 세계인 백귀야행의 주인은 누구든지 이름을 먼저 빼앗아서 그를 지배한다. 치히로는 온천장에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를 도와주는 하쿠는 치히로에게 본명을 숨기되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의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유행하는 동안 우리는 환자의 이름을 모르고 숫자 1, 2, 3으로 그들을 호명했다. 그들이 숫자로 불리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원래 속했던 세계에서 벗어나 단지 코로나에 감염된 익명의 환자일 뿐이었다. 회복되면 그들은 다시 번호를 버리고 자신의 이름이 속한 사회로 돌아갈 것이다.

치히로는 계약서를 쓰면서 치히로라는 이름 대신에 센이라는 이름을 쓴다.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직위로 불리게 되면서 ‘나’라는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직장에서 김 대리, 손 부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김 대리와 손 부장의 개인적인 자아는 없다. 철저한 직장의 구성원으로서의 김 대리와 손 부장만 있을 뿐이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거기서 나갈 수 없다는 하쿠의 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말이다. 치히로가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치히로에게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치히로는 센이 되면서 치히로를 잃어버렸고, 센은 치히로가 되면서 센을 잃어버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센과 치히로는 찾을 수 없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쉬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조차 바꾸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센과 치히로라는 이름을 통해 우울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과 끝없고 추한 인간의 탐욕을 보여 주면서 행방불명된 치히로를 찾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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