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칠인정.



▲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 인동 장씨의 600년 된 집성촌에 자리한 ‘포항의 두문동’ 칠인정. 김진홍 기자
▲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 인동 장씨의 600년 된 집성촌에 자리한 ‘포항의 두문동’ 칠인정. 김진홍 기자


2020년 봄날을 코로나19와 국회의원 총선이라는 국가적 국민적 이벤트가 관통했다. 코로나19는 국민적 협조 속에 극복되어가고 있다. 총선 결과 지역에서는 현 정권 심판이라는 역대 선거의 중간평가 관례를 보였으나 전국적으로는 지역민심과 달리 현 정책 지지세로 나타났다.

역사에도 있었다. 이미 600여 년 전, 이 땅에 왕조의 흥망이 교체되었을 때. 그 때 뜻있는 망국의 유민들은 거취를 분명히 했다. 그들은 더러 산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고 일부는 두문동(杜門洞)을 만들기도 했다. 그 자취 중 하나인 포항 흥해읍 초곡리 칠인정(七印亭·경북도 문화재 369호)을 찾는다.



▲ 칠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태로 위층에는 전면 3칸을 같은 크기로 간살을 잡아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1개씩 둔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 칠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태로 위층에는 전면 3칸을 같은 크기로 간살을 잡아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1개씩 둔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칠인정을 찾은 날은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포항시내에서 영덕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흥해읍을 못미처 아파트 공사장을 지난다. 도시가 온통 옛길과 새길이 뒤엉킨 데다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자칫 큰 길을 가면서도 길을 잊기 일쑤였다. 선린대학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초곡리가 나왔다. 수백 년 전 옛날이면 깊은 산속이었을 길가에는 새로 전원주택촌이 들어서 있다. 마을 입구 소나무 숲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아 옛날 왜구의 습격도 피해갈 수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더듬어 길을 올라가 만나는 마을 이름이 사일(士逸)이라니, 참으로 선비가 숨어 지낼 만한 곳이었을 법하다.



▲ 칠인정 뒤뜰.
▲ 칠인정 뒤뜰.


초곡리는 인동장씨 집성촌이다. 이곳 인동장씨들은 600여 년 전 고려말 이곳으로 들어온 장씨 10세손 장표를 흥해파의 파조로 모시고 있다. 장표(張彪)는 고려말 공민왕때 정6품 무인으로 흥의위(興義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지낸 장수였다.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인동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영일의 도음산 자락 초곡으로 숨어든다. 그는 초곡에 초막을 짓고 은거했으니 마을 이름 사일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마을 끝 칠인정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정자를 호위하고 있다. 칠인정 앞 네모꼴 연못은 원래 아름다운 연못이었는데 문화재 당국이 보호한다며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오히려 경관을 해친 꼴이 됐다고 장표의 20세 후손 장실근(71)은 회상한다. 어릴 때 이 연못 근처에서 뛰놀았다며 그 풍류를 찾을 길어 안타깝다고 한다. 연못 주위의 모란은 활짝 만개해서 계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500년은 되었음직한 두 그루 느티나무는 이제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300년 넘은 연못 앞 세 그루 배롱나무는 아직 잎을 피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칠인정 내부.
▲ 칠인정 내부.


정자는 여러 차례 중수했다. 태종 때 정자가 세워진 뒤 370년 뒤 어느 가을 태풍에 정자가 휩쓸려 사라졌고 후손들이 새로 지었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기금을 마련해 새로 짓고 괴목도 다시 심었다.

마을 뒤 정남향으로 경사면에 지어진 정자는 뒷면으로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했고 2층 누각 형태로 건축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는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불을 때는 함실을 만들어 놓았다. 왼쪽에는 효우재(孝友齋), 오른쪽에는 경수당(慶壽堂)이라 문패를 걸었다. 온돌방 앞으로는 양쪽에 세살창살의 여닫이문이 달렸고 옆에는 외짝 세 살 여닫이이문이 달려있다. 중수 후 칠인정 현판은 조선 정조대 초서의 대가 송하 조윤형이 썼다.

가운데 개방형 마루에는 사간정 정언 남경희의 칠인정기와 후손 장택영, 장석영이 쓴 칠인정중수기, 권엄의 상량문, 회재의 후손 이정엄의 방문기 등이 수두룩 걸려 있다. 더 많은 시인묵객 선비들이 이 곳을 찾아 기록을 남겼으나 모두 걸어놓을 수 없을 정도라고 장근실 씨는 자랑한다.

장표가 환갑이 되던 태종 9년(1409), 급제한 그의 네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모두 관복을 입고 허리띠를 차고 축하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관복의 관인들을 풀어 기념식수한 괴목에 묶었다고 정자 앞 설명서에는 적혀있다. 정자 이름이 칠인정이 된 연유다. 정자 현판 칠인정은 뒷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명필 조윤형의 편액 칠인정은 국립국학원에 보관돼 있다.

사실 관인을 묶었는지 또는 허리띠 끈을 묶었는지는 기록이 다르지만 정자 이름이 인(印)자가 들어가고 정자의 중수기 등 여러 기록에 따라 도장을 묶었다는 것이 정확할 수 있겠다.

▲ 정자 앞에 서 있는 450년된 느티나무(쌍괴수)
▲ 정자 앞에 서 있는 450년된 느티나무(쌍괴수)


또 정자 앞 느티나무도 설명서에는 회화나무로 적고 있는데 중수기 등 기록에는 분명히 쌍괴수(雙槐樹)라고 했으니 처음부터 두 그루 느티나무였을 것이다. 이 느티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우 우’ 소리를 냈다고 하고 6·25 한국동란때도 그런 소리를 냈다는 소문에 대해 후손들은 그냥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어쨌든 그는 불사이군의 충절로 초곡에 숨어들어 초막을 짓고 은신했지만 자손들의 출사만은 허락했으니 시절의 선비라 부를 만하다. 그의 유언에 자신은 고려의 신하요 가문은 고려조의 10세충효세족이라 말하고 있으면서 자손에게는 자손의 시대 임금인 조선에 충성하라고 명했음이다.

그의 아들은 봉화현감 을제, 운봉현감 을하, 중림우 을해, 청하현감 을포 등 넷이고 사위는 봉상소윤 유정봉, 강진재 이읍, 주부령동정 이현실 등 삼인이다. 부모의 자랑은 자식의 출세에 있고 자식의 효도 중 제일은 벼슬길에 올라 청운에 이름을 높이는 것이니 은둔지사 장표로서는 참으로 자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인패(印佩)를 차고 환갑연에 참석했으니 정자 이름을 후세에까지 남길 만하지 않은가.

더구나 을제의 아들 윤문은 해적들을 토벌해서 공신이 되었고 그 아들 셋이 모두 벼슬을 했으니 ‘3세7인’(三世七印)이라고 남경희의 중수기는 적었다.

뒷날 칠인정을 중수한 뒤 장표의 후손 장택영이 쓴 칠인정중수기에는 장표가 임종할 때 “우리 집안은 10대로 고려의 충신이었고 나는 고려시대 태어나 나라가 망하였으나 따라 죽지 못하였다. 나의 수연에 그대들이 헌수함은 자식된 도리로 당연하겠으나 나는 어버이를 잃은 슬픔보다 더하다. 나는 옛 신하 복장으로 선왕을 뵈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조선의 은혜를 입었으니 힘을 다해 내 조상이 고려를 섬긴 심정으로 임금을 섬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고 유언했다.

▲ 칠인정의 낮은 굴뚝.
▲ 칠인정의 낮은 굴뚝.


장택영의 중수기가 근세(1985년)에 쓴 것이지만 후손으로서 옛 기록을 참고해 썼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신 고려의 신하로 불사이군의 심정으로 초곡동에 숨어들었지만 자식들만은 출사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은거의 대명사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고사를 상기시킨다. 혜강은 대대로 조조의 위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사마씨의 진나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그는 끝내 진나라 사마소의 초빙을 거절하고 목숨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의 아들 혜소는 같은 죽림칠현 산도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서 진 혜제의 시중이 된다. 정치적 격랑기 변란이 일어나고 모든 신하들이 도망가지만 혜소는 마지막까지 황제를 지키다가 순사한다. 이는 정치적 이유로 자발적 격리를 선택한 지사의 명분이 대를 이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보여 준 것이다.

정조 때 문인 남경희가 쓴 칠인정기가 정자마루 한가운데에 걸려 있다. 기문에서 남경희는 “장표 공은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서 자손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의(義)가 없다고 하여 마땅히 의(宜)를 좇았다. 지금 임금도 성군이요, 공도 당세의 절의사인데 세상이 야은 길재나 운곡 원천석만 절의군자로 칭송하면서 공은 알아주지 않으니 나타내고 묻어지는 것이 때가 있는가?”하고 세상이 장표의 절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 칠인정 앞에서 만나는 쌍계수를 끌어들여 연못으로 만든 ‘소담축’
▲ 칠인정 앞에서 만나는 쌍계수를 끌어들여 연못으로 만든 ‘소담축’


장표의 불사이군 충절은 그의 묘비에서도 나타난다고 장표의 21세후손 장재우 씨는 얘기한다. 칠인정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마을 산비탈 장 공의 묘 옆에 있는 묘비는 옆으로 향하고 있다. 동행한 장표의 20세 후손 장지화(67) 씨는 햇빛을 바로 받기가 민망해서였을 것이라고 했다. 장표 공의 묘지가 600년 전 들어섰지만 비석은 후대에 세워졌을 것이고 그 후손들이 불사이군 절의를 표현하기 위해 묘비를 옆면으로 향하게 세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장 공의 불사이군 절의가 칠인정의 수많은 현판 시문과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인동장씨 흥해파는 장표 공의 칠인정 기록에서 확인한 것처럼 후대로 내려와 수많은 국가동량과 학계 경제계 인사들을 배출했다. 그것이 조상의 음덕임을 증명하듯 해마다 열리는 장표 공의 시제에는 다투어 제상을 주관하려 해 이미 8년 후의 유사까지 정해졌다고 장표의 21세 후손 장재우(77) 씨는 자랑한다.

장표 공의 모지를 지키는 재실 옆에는 참으로 희귀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소나무는 밑둥이 마치 커다란 용이 똬리를 튼 듯 자리를 잡고 위로는 용이 승천하듯 용틀임하는 모양으로 가지를 뻗어내고 있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소나무는 10여년 전 어느 기업인이 수억원을 주고 사겠다고 계약하고는 부도가 나서 잔금을 치르지 못해 지금도 공의 산소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영일민속박물관

칠인정에서 5km 남짓 흥해읍 소재지에 한 때 흥해군의 동헌으로 쓰였던 제남헌(齊南軒)이 지금은 영일민속박물관으로 바뀌어 보존되고 있다. 1983년 개관된 박물관 전시실에는 농기구에서 생활용구 토기 등 2300여 점이 전시 보관되고 있는데 군 단위 민속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박물관으로 지정된 영예를 갖고 있다. 넓은 앞마당엔 600년 된 회화나무가 위용을 보여주고 대원군 척화비도 보존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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