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19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이룬 빅토리아 여왕은 신하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3년마다 1개월씩의 유급 독서 휴가였다. 이 휴가의 조건은 단순했다.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정독하고 독후감을 써내는 것뿐이었다. 일명 ‘셰익스피어 휴가’로 부르는 제도다.

이보다 400여 년 앞선 조선시대에도 독서휴가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책을 읽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조정의 업무 때문에 신하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세종이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은 어명으로 내린 독서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였다. 사가독서는 집현전 학자들이 조정의 업무 부담 없이 일정기간 동안 독서를 통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특별히 주는 휴가 제도이다. 이 기간 동안 경비는 나라에서 부담했다.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오직 독서에 전념해 성과를 내서 내 뜻에 부응하라(세종실록 8년)” 1426년에 내린 이와 관련된 첫 어명이었다. 이후 사가독서는 영조 49년(1773년)까지 340여 년간 지속되면서 총 48차에 걸쳐서 320명이 선발되었다.

며칠 전 보았던 EBS ‘지식채널 e’ 프로그램 중 한 편의 내용이다. 밤늦은 시간에 방영하는 지식채널e는 단편적인 지식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시청자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프로그램이다. 한번씩 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내용이 많아 자주 찾아보게 되는 방송이다.

사가독서 어명을 받든 신하들은 조정 업무 대신 집에서 책을 읽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이 되기도 했다. 세종 때 왕의 기대에 부응해 사가독서를 했던 인재들은 전 분야에 걸쳐 책을 편찬해냈다. 15세기 조선 시대의 문화 전성기를 꽃 피운 것이다. 넓게 보면 사가독서는 조선 시대 다양한 인재 탄생의 비결이기도 했다. 권채의 ‘향약집성방’, 남수문의 ‘고려사절요’가 이로써 태어났고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도 사가독서의 결과물이었다.

세종 당시의 사가독서 제도를 현재 시대로 소환해보는 건 어떨까. 이제 막 선출된 300명의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돌아가며 이 제도를 시행해보는 거다. 어명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명으로 말이다. 슬기로운 21대 국회생활을 독서로, 공부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국회는 코로나19 방역 이후 경제방역의 성공을 위해 관련법을 정비하고 지원해야 할 급박한 때다. 시간이 없다.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다. 결과물을 제출하고 거기에 대한 평가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사가독서에 들어간 신하들도 책만 읽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집에서, 때로는 산사를 오가며 자유롭게 책을 읽고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나 읽은 책의 권수를 삼개월마다 보고서로 제출해야 했고 매달 세 차례 읽은 책과 관련된 연구물인 월과(月課)를 내야만 했다. 또 사가독서를 마칠 때는 독서의 결과물을 글로 지어 제출하도록 했다. 막대한 양의 성과물이 나왔던 것이다.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독서당(讀書堂)을 지어 이곳에서 마음껏 책을 읽도록 했다. 독서당은 한양에만 세 곳이 있었다. 동호당과 서호당, 남호당이 그곳이다. 율곡이이의 동호문답은 동호당에서 책을 읽으며 저술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국회에 이런 사가독서를 권하는 이유는 더 이상 막말국회, 동물국회, 싸우는 국회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젠 공부하는 국회, 그럼으로써 정책중심 국회, 일하는 국회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폼 잡는 자리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꼬박꼬박 세비가 나오는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21대 국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공부하는 국회’ 움직임이 조금씩 일고 있다. 그나마 좋은 모습이긴 하지만 임기 초반의 반짝 공부모임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국회의원 독서휴가제’부터 입법하는 게 어떨까. 물론 조선시대 사가독서처럼 중간 중간 철저하게 과제를 제출하고 최종 성과물에 대해서는 평가도 받아야 할 것이다. 세종 때의 사가독서가 국회에서 현대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면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조금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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