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外

날마다 봄빛은 더 푸르게 짙어져만 간다. 지겨운 집콕에서 벗어나 가벼운 차림으로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떠날 때 시집 한 권이 함께하면 더 즐겁지 않을까? 서점 신간코너에 새로 들여놓은 시집 몇 권을 옮겨온다.



▲ 김호진 시인의 2번째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가 출간됐다.
▲ 김호진 시인의 2번째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가 출간됐다.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김호진 지음/시와반시/93쪽/1만 원

김호진 시인의 2번째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가 출간됐다. 2002년 출간된 첫 시집 ‘생강나무’가 삶과 우주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면서 그 대답을 향한 애끓는 몸짓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는 현실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애잔한 순간과 풍경들을 따라간 절절한 흔적 같은 것들이다.

현직 약사이기도 한 김호진 시인의 이 시집은 열정적으로 살아온 작가의 섬세하고도 진정성 있는 실존적 고백을 담은 결실이다.

시집과 함께 실린 문학적 산문 ‘나선 곳’에서 시인은 “젊은 날 소리 없이 스며든 철학적 질문들이 존재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요구하며 오래도록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시가 그리움과 자유, 철학적 질문들을 통해 근원적인 해답을 궁구해가는 경로에서 시작됐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는 유독 ‘애잔한 순례자’같은 유동적인 ‘길’의 이미지가 많고, 그 위를 아득하게 감싸고 있는 슬픔의 문양이 짙게 배여 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는 ‘그리움’이란 감상(感傷)을 동반한 심리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어떤 깊은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갈망에서 오는 근원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선은 주류로부터 밀려난 주변자들을 한결같이 향하고 있는데, 한적한 시골에서 탑을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김노인과 군청 앞에서 농민의 세상을 외치던 이씨가 그들이고 약값 대신 쑥떡을 두고 간 허리 굽은 할매가 그들이다. 이는 자신의 상처나 그리움을 기록하면서도 낱낱 존재자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늘을 동시에 투사하는 관찰과 표현의 미학을 낳고 있다.

같은 선상에서 그는 유독 오지를 찾아 떠도는데, 석양 무렵 시신을 태우는 인도 갠지즈 강가 화장터이기도 하고, 오체투지로 고행의 길을 가는 티벳의 히말라야 부근이기도 하고, 하늘거울에 비친 풀밭의 음표들이 반짝이는 시원(始原)의 땅 몽골에서 우기에 끊긴 구겨진 길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다 불쑥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발해의 유적지를 찾아 가는가 하면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다시 타클라마칸사막에 갈 꿈을 꾸기도 한다.

이렇듯 그는 잃어버린 대상을 ‘그리움’으로 투시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의 낭만주의자이고, 못 타자들에게는 따스한 사랑을 확인해가는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김호진 시인 스스로는 삶의 깊이를 측정하는 진중한 ‘성찰’의 시인이다.

▲ 김요아킴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공중부양사’
▲ 김요아킴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공중부양사’
◆공중부양사/김요아킴 지음/애지/142쪽/1만 원

김요아킴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2003년 등단 이후 줄곧 삶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성찰, 그리고 사회적 쟁점이 발생하는 고비와 길목마다 시인으로서의 현실참여와 문학적 응답을 회피하지 않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일상의 시공간을 바로 비추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만드는 데 온 마음을 다한다. 지난한 현실의 경계에서 통증 깊은 서사와 서정을 버무리며 삶의 안녕을 묻는 그의 시세계는 우리시대의 문학적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은 3, 4부의 시편을 구성하는 ‘금곡동 아파트’ 연작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연작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외 의식과 장소 상실감을 문명 비판적 시각에서 표현하며 부서진 ‘대지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금곡동은 도시 개발과 자연 파괴의 공간이지만,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생의 배움을 얻는 장소이다.

표제작 ‘공중부양사’도 아파트 외벽 창문을 청소하는 노동자에 관한 작품으로 시인은 노동자의 삶과 시적 화자의 생을 오버랩시킴으로써, 생활과 존재의 흔들림 속에서도 버티고 견뎌내야 할 마음과 삶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기어코 ‘오늘’을 살아내야 할 삶의 통점을 받들어 ‘내일’로 나아간다.

시인은 역사적 사건을 소환하고 기억하는 작업도 이어간다. ‘유감(有感)’과 ‘초량, 소녀 앞에 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위안부 강제동원의 폭력성을 조명하고 있으며, ‘불턱 방담(放談)’, ‘현무암 각질 서비스’ 등은 해방공간 제주에서 벌어진 참담한 국가 폭력의 슬픔을 애도하고 있다.

또 ‘진혼을 위한 서곡-괭이 바다’, ‘뼈무덤-그날, 여양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마산 여양리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을 증언의 형식으로 복원하고 있으며, ‘사드, 그리고 Donna Donna’와 ‘임진강’, ‘둥근 만남-널문리 주막마을에서’ 등은 신냉전 체제의 위험을 비판하며 평화를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 백무산 시인의 신작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 백무산 시인의 신작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백무산 지음/창비/129쪽/9천 원

한국 노동시를 대표하는 백무산 시인의 신작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가 출간됐다. 백석문학상 수상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열 번째 시집이다. 1984년 무크지 ‘민중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해왔던 시인은 그동안 끊임없는 시적 갱신과 변모를 거쳐 노동시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10여 년간에 펴낸 세 권의 시집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가 모두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성과도 인정받았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동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는 웅숭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친다. 치열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과 시대상을 침통한 눈으로 응시하는 고백록과도 같은 묵직한 시편들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나 생태 문제 등으로 시 세계의 폭을 넓혀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시간’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전복적 사고를 보여준다. 시인은 ‘혁명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정지의 힘’을 예찬하면서 이 ‘정지의 힘’이야말로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를 찾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는 삶의 과정은 없고 오로지 목표만 존재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감각, ‘인간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길이다. 그것은 또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건 완성된 것에서 시작돼 카운트다운될 뿐, 자본의 폭력에 얽매여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진 삶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수록 시인은 ‘풍경을 풍경으로 이해’했던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친다.

이렇듯 삶에 밀착돼 다가올 시대를 예감하는 백무산의 시는 현란하고 뒤틀린 언어들을 비집고 나오는 사람의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늘 우리 곁에서 희망의 노래로 빛날 것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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