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40여 살이 된 소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재빨리 낫을 가져와 코뚜레와 목줄을 잘라준다. 그리고 말한다, “좋은데 가거라. 고생하고 애먹었어.”

할아버지는 어릴 때 침을 잘못 맞아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 30여 년을 둘은 그렇게 살았다. 소가 움직일 때마다 목에 걸린 워낭에서는 딸랑딸랑 천천히 소리가 울린다. 워낭소리는 할아버지와 소의 교감 방법이고 서로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소리이다.

봉화 청량사의 가파른 길을 올라 세상의 끝에 서 있는듯한 탑 앞에서 노부부는 소의 명복을 빈다. 소가 죽으니까 안됐냐고 묻는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럼 안됐지, 사람이나 짐승이나 뭐가 다르다고.”

워낭소리는 어릴 때 늘 듣던 소리였다. 쇠죽을 먹느라, 마굿간을 나오느라, 고개를 흔드느라 소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거렸다. 소는 천천히 움직이는 짐승이라 워낭소리도 소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소리를 내었다. 산에 소 풀을 먹이러 갈 때도 우리는 워낭소리로 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소마다 워낭소리가 달라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워낭소리만으로도 누구 소인지를 분간했다. 소와 워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귀에는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가 먼저 죽고 난 후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으면 소 옆에 묻어 달라고 한다. 늘 쟁기를 지고 고랑을 만들던 밭 가운데 있는 소의 무덤을 찾아가 흙 묻고 갈라진 손으로 워낭을 들고 밭둑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번은 봉화장에서 돌아오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이었다고 했다. 소가 잠든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저 혼자 집을 찾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동차가 질주하는 이 시대에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봉화 시내를 다니고, 마을 회의에도 참석하신다.

동행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조건을 계산해가며 동행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와 소처럼 30여 년을 함께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동행의 의미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소하고 같이 죽을 걸 염원하지만 죽음이란 게 그렇게 함께 오지는 않는다. 죽음마저도 소와 함께 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염원대로 지금 그들의 무덤은 한 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소가 죽으면 묻어 줄거냐는 동네 사람들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말한다. “당연하지, 장례 치러 줘야지, 상주 할 건데.” 할아버지에게 소는 소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분신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할아버지의 다리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 준 소다.

봉화는 길마다 골마다 풍경이 아름답다. 거기에 봉화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찍은 ‘워낭소리’가 더해졌을 뿐이다. 풍경이 아름다우니 사람 사는 모습도 아름다워 ‘워낭소리’같은 다큐도 나왔으리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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