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왕실의 위엄과 국론통일 위해 황룡사 17년 걸려 완공

▲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 강화와 불교를 통한 국론통일을 염원하며 553년부터 17년 시간을 들여 완공한 국가사찰이다. 금당터에 장륙존상과 10대 제자, 금강역사 등의 자연석 대좌가 그대로 남아 있다.
▲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 강화와 불교를 통한 국론통일을 염원하며 553년부터 17년 시간을 들여 완공한 국가사찰이다. 금당터에 장륙존상과 10대 제자, 금강역사 등의 자연석 대좌가 그대로 남아 있다.
황룡사는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면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꿔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했지만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 때에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현재의 사찰 규모로 발전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것만 보아도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난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걸이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발휘한 권력지상주의의 내력이 적힌 야사를 들어보는 것도 호사롭다.

▲ 황룡사의 중심은 황룡사구층목탑으로 옮겨왔다. 구층목탑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해 건축되었다. 1238년 몽고난으로 불타 없어지고 기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다.
▲ 황룡사의 중심은 황룡사구층목탑으로 옮겨왔다. 구층목탑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해 건축되었다. 1238년 몽고난으로 불타 없어지고 기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다.
◆역사 속의 칠처가람, 황룡사

황룡사는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를 고쳐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했다.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했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황룡사를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고, 그들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바로 신라의 땅이라 인식했다.

현재까지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부지는 약 8만여㎡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사역지 주변에는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 가람 배치의 정형인 일탑에 일금당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일렬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 황룡사는 남문,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등의 신라시대 가람배치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금강역사를 세웠던 기초석이 남아 있는 중문터.
▲ 황룡사는 남문,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등의 신라시대 가람배치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금강역사를 세웠던 기초석이 남아 있는 중문터.
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에서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성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어 절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또 황룡사의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대의 왕들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황룡사에 친행해 100명의 고승이 모여 백고좌강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황룡사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큰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귀국해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했다.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탑의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했다.

▲ 황룡사지 발굴 과정에 드러난 회랑지. 황룡사는 사역이 8만여㎡에 이르렀던 것으로 분석된다.
▲ 황룡사지 발굴 과정에 드러난 회랑지. 황룡사는 사역이 8만여㎡에 이르렀던 것으로 분석된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의 아홉 나라를 상징한다. 이는 이들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다. 고종 25년인 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

황룡사에는 또 장륙존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에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

황룡사에는 또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몽고군이 침략해 방화로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당간지주가 서 있고, 넓은 터에 보리밭이 조성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당간지주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역사문화관이다.
▲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당간지주가 서 있고, 넓은 터에 보리밭이 조성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당간지주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역사문화관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와 미실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고, 불교를 통한 국가통치이념을 정립해 안정적인 국가 경영, 귀족과 백성들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건립한 국가사찰이다.

진흥왕의 이 같은 황룡사 건립에 대한 생각은 후궁 미실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졌다.

미실은 신라시대 왕실의 여인을 배출하는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의 계승자로 왕실의 여인이었다. 미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진에게 색공을 교육받았고, 출중한 외모에다 왕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 학문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다양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인물로 왕실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미실은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자질을 십분 활용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재주에 못지않은 욕심이 왕의 권세와 화랑도까지 손아귀에 넣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했다.

▲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라시대 우물지가 황룡사 터에 남아 있다.
▲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라시대 우물지가 황룡사 터에 남아 있다.
미실은 처음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과 일가를 이루었으나 뛰쳐나와 화랑 사다함과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왕가로 돌아와 진흥왕의 후궁이 되어 본격적인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실의 욕심은 진흥왕의 뜻과 교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진흥왕은 미실의 뜻에 따라 정복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땅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는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황룡사도 미실의 입김으로 태어났다. 진흥왕 심맥종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미실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나라의 사찰을 크게 일으킨다면 왕의 권위는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꿔 황룡사를 지었다.

미실은 황룡사 금당 옆에 왕실의 복을 비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미실은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권력의 최고 실세로 행세해 진흥왕 이후 진지왕 옹립과 폐위, 진평왕 옹립에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다.

▲ 황룡사의 사역을 짐작하게 하는 담장터가 길게 이어져 있다.
▲ 황룡사의 사역을 짐작하게 하는 담장터가 길게 이어져 있다.
미실의 탁월한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색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진흥왕이 직접 칼을 들고 백제, 고구려 정복전쟁의 선두에 나서고 있을 때 태자로 임명되었던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도 미실의 치마폭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

미실의 정치적 사랑방은 황룡사 사당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도 황룡사에서 피로를 풀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해소해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웠다.

미실의 정치적 야욕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 거칠부와 손잡고 진흥왕을 흥륜사로 유폐시킨 이후 진지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미실을 왕비로 책봉하겠다던 진지왕이 약속을 어기고 여색을 탐하자 진지왕도 미실의 손에 처참하게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다.

▲ 금강역사가 서 있었던 중문지 터 옆에 목탑지와 회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 금강역사가 서 있었던 중문지 터 옆에 목탑지와 회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미실은 황룡사 사당에서의 정치로 가야출신 노리부와 손잡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그리고는 다시 왕의 여자로 실력을 행사하다 진평왕 10년 609년에 병들어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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