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왕실의 위엄과 국론통일 위해 황룡사 17년 걸려 완공
황룡사는 진흥왕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했지만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 때에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현재의 사찰 규모로 발전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것만 보아도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난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걸이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발휘한 권력지상주의의 내력이 적힌 야사를 들어보는 것도 호사롭다.
황룡사는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를 고쳐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했다.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했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황룡사를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고, 그들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바로 신라의 땅이라 인식했다.
현재까지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부지는 약 8만여㎡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사역지 주변에는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 가람 배치의 정형인 일탑에 일금당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일렬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역대의 왕들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황룡사에 친행해 100명의 고승이 모여 백고좌강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황룡사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큰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귀국해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했다.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탑의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했다.
황룡사에는 또 장륙존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에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
황룡사에는 또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몽고군이 침략해 방화로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고, 불교를 통한 국가통치이념을 정립해 안정적인 국가 경영, 귀족과 백성들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건립한 국가사찰이다.
진흥왕의 이 같은 황룡사 건립에 대한 생각은 후궁 미실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졌다.
미실은 신라시대 왕실의 여인을 배출하는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의 계승자로 왕실의 여인이었다. 미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진에게 색공을 교육받았고, 출중한 외모에다 왕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 학문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다양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인물로 왕실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미실은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자질을 십분 활용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재주에 못지않은 욕심이 왕의 권세와 화랑도까지 손아귀에 넣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했다.
미실의 욕심은 진흥왕의 뜻과 교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진흥왕은 미실의 뜻에 따라 정복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땅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는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황룡사도 미실의 입김으로 태어났다. 진흥왕 심맥종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미실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나라의 사찰을 크게 일으킨다면 왕의 권위는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꿔 황룡사를 지었다.
미실은 황룡사 금당 옆에 왕실의 복을 비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미실은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권력의 최고 실세로 행세해 진흥왕 이후 진지왕 옹립과 폐위, 진평왕 옹립에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다.
미실의 정치적 사랑방은 황룡사 사당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도 황룡사에서 피로를 풀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해소해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웠다.
미실의 정치적 야욕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 거칠부와 손잡고 진흥왕을 흥륜사로 유폐시킨 이후 진지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미실을 왕비로 책봉하겠다던 진지왕이 약속을 어기고 여색을 탐하자 진지왕도 미실의 손에 처참하게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