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그날이 오면

발행일 2020-05-10 15:40:1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부을듯 어둑한 하늘이다. 서울 총회가 있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 차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택시를 잡으려니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할 수없이 차를 몰고 가서 주차장에 넣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운전하면서 주차할 공간을 걱정하며 나섰는데, 아~코로나 덕에 좋아진 것들이 많구나 싶을 정도다. 거리는 한적하고 그렇게도 밀리던 주말 동대구역 주차장에는 아슬아슬 도착해도 자리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미루고 미루어졌던 모임이 조심스레 재개하였고 코로나19 덕분에 기차를 놓치지 않고 탈 수 있으니, 세상에 모두 나쁘기만 한 것도 모두 좋기만 한 것도 없다는 말이 진리임을 떠올린다.

대구가 온통 혼란에 빠졌을 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금해서 보내주고 마스크를 구해주면서 걱정스러워하던 한국 여자의사회, 그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러 대구경북지회 임원들이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아직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대구경북에서 서울 모임에 참석을 해도 되겠는가 내심 망설이고 있으려니 집행부에서 코로나19 대구경북에서 물러가라고 했다는 우스개를 하면서 위축되지 말고 꼭 참석해달라고 여러 차례 연락이 왔다. 챙겨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출발하는 날까지 망설였다. 어쩌겠는가. 코로나19로 고생했다면서 표창도 하고 모범지회상을 받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했다. 지근에 사는 임원들과도 오랜만에 역에서 만나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눈빛을 교환하며 주먹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창 너머 들판에는 곱게 다듬어진 못자리가 너무도 평화로운 정경이다. 간간이 스치고 지나가는 빗방울이 고속에 흩날리는 풍경에도 위안을 얻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창가로 모두 띄어 앉아 마스크를 쓰고서 일체 말이 없어 기차에 몸만 실려 간다.

이번 총회는 회장 이·취임식이 있는 행사라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드문드문 자리를 만들어둔 테이블에서 각 지회 참석자들이 오랜만에 만나 말없이 눈인사를 교환하며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어둑하던 날씨도 창을 여니 그야말로 분위기 있는 저녁을 연출한다. 두려움 속에 맞이한 모임이지만 코로나19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는 불안감을 잊게 할 정도로 정이 넘치고 감동적이다. 진심 어린 축사와 시상식이 이어졌다. 그중에는 9세 나이로 전쟁 통에 내려와서 남쪽에 남겨진 아이, 지금은 원로가 되신 분께서 사재를 다 털어서 빛나는 여의사 상을 제정하여 시상하는 코너도 있었다. 그분의 어머니는 9살 난 딸을 피난지에 혼자 두고서 “여기 있으면 엄마가 북에 두고 온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곧 너를 찾아서 오마”하고 북으로 돌아가셨다. 그 길로 헤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하니 어린 여자 아이는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엄마가 꼭 다시 데리러 올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으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의사가 되었고 평생 의술을 의지 삼고 여자 의사회를 위해서 정말 헌신하셨다. 후원금 모금에는 언제나 그분의 성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원로가 되어서도 언제나 모임에 참석하여 좋은 말씀을 해 주시던 그분께서 후배 여의사들이 더욱 빛나는 활동을 하기를 바라면서 ‘빛나는 여의사 상’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매일같이 일하여 아끼고 모았던 전 재산을 후배 여자 의사들을 위해 선뜻 내놓으신 그분의 통 큰 헌사에 정말 감사한 마음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자 의사회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었음에 참석자 모두 가슴 뭉클하였으리라.

대구경북이 코로나19로 고생 많았다면서 여러 차례 언급해주신 분들 덕분에 가슴이 따스해왔다. 모범지회상을 받고 기념 촬영을 하고 테이블로 돌아와서 지회 임원들에게 보여주며 자축하는 의미로 건배를 하였다. 그간의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지만 차 시간에 맞추어서 조용히 빠져나와 빗길을 걸었다.

밤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반갑게 손잡고 얼굴 마주하며 웃고 웃을 날이 언제 다시 찾아오려나. 옛날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는 날이 과연 다시 오기나 할 것인가. 몽롱하게 감회에 젖어드는데 다른 모임의 일원인 남자 교수님께서 전화하셨다. 궁금하여 통화하니 ‘혹시 상이 바뀐 것 아니냐?’고 하신다. 그분의 아내가 받아온 상이 내가 받아가야 할 상패와 상장이라는 것이 아닌가. 코로나19가 수상자도 서로 바꾸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일까. 누군가의 실수가 만들어주는 의외의 인연, 어쩌면 그것은 기적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가 물러가는 그날이 오면, 언젠가는 새로 이어진 인연을 찾아서 옛이야기 나누면서 웃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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