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코로나19는 건강에 대한 불안과 생계의 막막함을 줬다. 불행 중 다행으로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고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되었다. 필자 역시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작은 필기구부터 책걸상까지 소독약으로 닦다보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스스로 만든 퇴근 시간에 맞춰 가족들에게 외식을 제안한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해 온 가족시간이기에 이번 약속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가족들의 환호와 들뜬 소리를 들으며 먹자골목을 향하는 발길은 괜스레 가벼워진다. 오랜만에 광장을 채운 사람들의 생기와 활력 넘치는 모습은 ‘생활 속 거리두기’의 결과물로 비춰진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한순간 낭패와 절망으로 바뀌고 만다. 아들, 딸이 선호하는 식당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큰소리와 몸짓으로 들떠있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코로나19의 종식으로 승전가를 부르는 병사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마스크를 낀 우리 가족이 오히려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결국, 오랜만의 기대에 찬 외식은 마트에서의 장보기로 끝나고 말았다.

연일 언론은 이태원클럽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확진자를 발표하고 있다. 서울 이태원과 강남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까지 전파되는 속도와 감염 강도는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보다 빠르다. 젊은이들이 가진 육체적 장점이 오히려 경증 혹은 무증상자로 나타나는 ‘조용한 전파자’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인 및 기저질환자의 감염이 우려된다고 보건당국은 발표하고 있다. 클럽 방문자 기록의 허위와 성소수자들의 신분노출에 대한 두려움이 겹치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찬사를 받던 ‘투명성’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성소수자들이 두려워하는 자의가 아닌 강제적 아웃팅은 자진신고 기피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제2의 신천지 현상으로 번질까 두렵다.

‘생활 속 거리두기’의 시작과 더불어 정부의 긴급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던 소상공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고3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우선 개학을 준비하던 교육부의 계획도 20일로 연기된 상황이다. 걱정이 앞선 학부모와 학생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택하고 있는 ‘9월 학기제’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와 동일하게 봄에 학기를 시작하는 일본의 9월 학기제 전환 찬성 여론이 56%란 점을 비춰볼 때,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이태원클럽에서 시작된 ‘젊음의 향연’은 국가 정책들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코로나라는 거대한 불길을 다잡아놓고 마지막 불씨로 인해 다시금 위급상황을 맞이하는 형국이다.

지난 9일 서울시의 집합금지 행정명령을 시작으로 경기도, 부산시, 대구시 등 각 지자체마다 긴급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유흥업소 및 다중 이용시설에 대한 운영과 방역 상황을 체크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예측이 불가능한 부분은 젊은이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부족과 자신들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증상에 대한 위험성이다. 최근 2차 감염으로 부모가 확진자가 된 경우에서 이러한 부분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세대 간 갈등구조 속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비난의 입장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법적 제재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 젊음은 특권이며 뜨거움과 역동성이 특징이다. 코로나19라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한 짧지 않은 기간의 인내와 고통을 잘 알기에 젊은 세대의 분출되는 해방감을 이해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신속한 검사체계와 의료진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확진자 제로라는 결과가 단 며칠 만에 무너진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도 ‘방종에 가까운 해방감’에 의해 생활 속 거리두기의 시작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상실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개인의 권리와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공익적 의무의 충돌 속에 우리의 방향성은 어디를 향해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점이다.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 서구 선진국들마저 무너지는 상황에서 우리를 지탱해 온 것은 ‘나’라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마스크 착용을 권하는 사회적 요구에 총으로 대응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내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염려하는 배려의 희생정신이었다. 전시상황과 다름없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싸워 이기려는 인내’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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