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로 쳐들어오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명해 문두루비법으로 수장시켜

▲ 경주 낭산자락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변에 문무왕의 비를 세웠던 귀부가 엎드려 있다. 귀부 주변에는 비각을 세웠던 주춧돌과 석재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경주 낭산자락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변에 문무왕의 비를 세웠던 귀부가 엎드려 있다. 귀부 주변에는 비각을 세웠던 주춧돌과 석재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주 사천왕사는 낭산자락 선덕여왕릉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호국불교의 의미를 가장 크게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설명된다.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주문했다. 명랑은 절을 지어 대응하려 했지만 시간이 급박하자 풀과 비단으로 절을 짓고, 12명의 유가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바다에 풍랑을 일으켜 적군을 수장시켰다.

사천왕사는 나라를 지킨 호국사찰로 이름을 내걸었고 양지, 월명 등의 유명스님들이 거쳐 간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의 터에는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당간지주, 두 기의 귀부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목탑의 기단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녹유신장상이 발굴 100년 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전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양지 스님의 조각솜씨로 전해지는 녹유신장상은 북쪽의 다문천왕상이 없이 3기의 천왕을 면마다 6기씩 잇따라 배치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문무왕의 삼국통일, 호국의지와 맞물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전해지는 사천왕사는 여전히 칠처가람의 하나로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손꼽히는 사천왕사의 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해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최초로 이탑일가람제의 형식이 나타난 호국사찰이다. 금당 앞쪽에 동서 목탑이 쌍탑의 형식으로 세워졌던 기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손꼽히는 사천왕사의 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해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최초로 이탑일가람제의 형식이 나타난 호국사찰이다. 금당 앞쪽에 동서 목탑이 쌍탑의 형식으로 세워졌던 기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호국사찰 사천왕사

신라 호국사찰 사천왕사는 경주시 낭산자락에 문무왕 19년 679년에 창건되었다.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일으켜 674년 신라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낭산 꼭대기 선덕여왕릉과 남쪽 신문왕릉 사이에 위치해 금당과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당간지주, 귀부 2기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사적 제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해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 밀당을 펼치고 있을 무렵 674년 2월. 당나라에 인질로 있던 김인문으로부터 의상대사를 통해 신라조정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백제와 고구려 자리에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해 야욕을 꿈꾸던 당나라가 그들의 도호부와 도독부를 공격한다는 빌미를 꼬투리 삼아 50만 대군을 앞세워 신라를 치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 사천왕사에 남아 있는 두 기의 귀부는 국보 제2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에 못지않게 거북등과 발 등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동쪽과 서쪽 어느 귀부가 문무왕의 비를 받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머리부분이 훼손된 동쪽의 귀부.
▲ 사천왕사에 남아 있는 두 기의 귀부는 국보 제2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에 못지않게 거북등과 발 등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동쪽과 서쪽 어느 귀부가 문무왕의 비를 받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머리부분이 훼손된 동쪽의 귀부.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군의 침략이 빠르게 진행되자 절을 지을 시간이 없었다. 이에 명랑은 풀과 비단으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12명의 유가명승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으로 전해지는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문두루비법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당나라 군사들이 신라의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어나 그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

당의 고종은 다음해에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명랑대사가 또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신라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바다에서 몽땅 수장시켜 버렸다.

문두루비법을 시전한 단석이 고려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 사천왕사 서쪽 귀부, 역시 머리부분은 잘려나가고 없다. 앞발은 다섯 개, 뒷발은 네 개의 발가락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사천왕사 서쪽 귀부, 역시 머리부분은 잘려나가고 없다. 앞발은 다섯 개, 뒷발은 네 개의 발가락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절은 금당 앞에 1기의 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로 운영되었다. 사천왕사는 신라 최초의 쌍탑가람으로 발전하는 형식을 보인다.

사천왕사에는 명랑과 양지, 경덕왕 당시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멈추었다고 전해지는 월명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 국립경주박물관 역사관에 문무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돌이 심하게 마모된 채로 발견돼 전시되고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역사관에 문무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돌이 심하게 마모된 채로 발견돼 전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덕장 법민과 문두루비법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신라를 가장 신라답게 만든 왕으로 손꼽힌다.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다. 법민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덕망과 지혜를 갖춘 장군으로 키워졌다. 아버지는 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이다.

법민은 아버지의 의도적인 교육법으로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무예수업을 전수받았다. 외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어머니와 박사들에게서 경전공부, 김유신으로부터는 무예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김춘추의 영리함과 장군으로의 기질을 이어받은 법민은 덕을 갖춘 장수로 자랐다.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백제와의 전쟁터를 누비면서 법민은 논밭에 널브러진 백성들의 시신을 보면서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나는 기필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하겠다.’

▲ 신라시대 최고의 스님이자 조각가 등으로 활약했던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녹유신장.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각각 보관하고 있던 신장상의 조각을 발굴 100년 만에 복원하는 데 성공해 경주박물관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신상.
▲ 신라시대 최고의 스님이자 조각가 등으로 활약했던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녹유신장.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각각 보관하고 있던 신장상의 조각을 발굴 100년 만에 복원하는 데 성공해 경주박물관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신상.
문무왕은 그러한 다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면서 전쟁터에서는 악착같이 군사들이 적게 다치면서 이기는 전략을 구사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할 때는 가르치는 김유신이 오히려 만류할 정도로 지독하게 매달렸다. “훈련할 때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쟁터에서 아군의 피 한 말은 될 것입니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실전보다 더 맹렬하게 훈련했다.

전쟁터에서 법민은 김유신 뒤에서 그를 보좌하는 한편 그의 전술과 전략을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김유신의 도법과 창술 등의 무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 김유신의 무예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법민의 무예 실력도 나중에는 김유신에 버금갈 만큼 뛰어나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법민은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킨 데 이어 고구려 멸망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백제를 정벌하면서 입은 상처로 아버지 김춘추 무열왕이 661년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신상.
▲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신상.
문무왕으로 즉위한 법민은 전장에 나가면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갑옷 속에 상복을 입고 투구 안에 두건 쓰는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문무왕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이기는 전쟁의 비법은 첫 번째가 적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적의 정보를 먼저 분석하는 철칙을 지켰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신라의 충실한 인재들을 알게 모르게 대거 파견해 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 분석했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고구려를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문무왕의 전략적 승리다. 적군 깊숙이 심어둔 첩자들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이간질하고, 전력을 약화시켜 결정적인 시기에 총공을 통해 승기를 잡았다.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물리친 문무왕은 당나라의 흑심을 알아채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짜 노골적으로 자극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문무왕은 당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 인문의 안부를 놓치지 않고 물으면서 당나라의 내정에 대한 정보를 얻어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의상대사를 비롯한 자질이 뛰어난 승려와 신하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당나라로 보내 정보를 깨알같이 챙겼다.

문무왕은 당나라의 고종과 후궁에서 황비로 등극한 측천무후의 조정에 대한 장악력과 영향력까지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군사를 빌려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룩했다. 다시 그들을 축출해 독립적인 국가로 우뚝 서는 기틀을 완벽하게 마련했다.

▲ 왼손에 칼을 든 신상.
▲ 왼손에 칼을 든 신상.
문무왕은 측천무후의 측량하기 어려운 심기와 그의 변화무쌍한 성격이 가져오는 신라에 대한 공격성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측천무후의 심기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김인문을 비롯한 당의 조정 깊숙이 첩자를 심어두었다.

문무왕의 세심한 전략 덕분에 당나라 군사의 대규모 이동을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해 그들이 신라 땅을 밟기 전에 모두 수장시켜 난을 피했다. 2년 연속으로 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당군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잇따른 해전에서의 패배는 당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게 했다.

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문무왕은 절대적 무공을 익힌 비밀결사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평화를 위해 문무왕의 숨은 비책은 대를 이어 왕실에 숨은 전략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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