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우리의 삶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알고 보면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 않을 것도 없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운명론자가 되는 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경험이 많아지면서일 것이다. 누군들 지금의 자신처럼 살고 싶었겠는가. 티 없이 맑은 어린 시절과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그때 가졌던 꿈과 열정이 속절없어진다.

“물고기, 개구리, 뱀 그 중에 하나라도 죽었다면 넌 평생 그 돌을 가슴에 얹고 살아갈 것이다.” 영화에서 뱀과 개구리, 물고기의 몸에 돌멩이를 묶어 놓고 놀다가 잠든 아이의 등에 큰 돌을 묶어 놓은 노승이 풀어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한 말이다. 물고기와 뱀이 죽었으니 아이는 두 개의 돌을 가슴에 얹은 셈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기 자기 가슴에 돌을 얹고 산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윤회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늙음 다음에는 젊음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난 계절에 가슴에 얹은 돌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으며 시간이 흐르고 그 돌의 무게로 점점 힘겨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는 일은 점점 무거워진다.

계율이 육신의 욕망을 없애지 못하고 비참과 불행을 모두 겪은 청년에게 노승은 담담하게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고 하지만 알면서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세상의 좋은 말들이 모두 우리 가슴에 박히고 삶이 말처럼 흘러간다면 고뇌와 고통은 왜 생기겠는가. 내가 좋은 것은 남들도 좋고, 내가 가진 것들은 언젠가 놓아야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 아름다운 명구들을 하나의 무늬처럼 흘려보낼 뿐이다. 그러면서 봄이 가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처럼 아이가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올 것이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로도 격찬을 받았는데 실제로 영화를 찍은 경북 청송의 주산지는 영화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노란 싹이 움트는 봄, 주산지에 몸을 담근 왕버들이 무성해지는 여름,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을, 하얗게 눈이 뒤덮이는 겨울,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주산지로 오르는 길을 가다 보면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절 하나가 문득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아 설렘이 깊어진다.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풍경을 담기 위해 잠을 설치며 달려와 삼각대를 걸어놓고 기다리지만 정작 그런 날은 흔치 않을 것이고, 비라도 내리는 날은 주산지에 그 작은 암자가 있는 듯도 하다.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미는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 파리에서 3년 동안 거리의 화가로 살았던 이력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그는 영화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오히려 그런 비정형성이 그의 영화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에서 그는 “나는 밤새 파리 시내를 헤매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닭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어스름한 아침, 흑인 청소부들이 거리를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파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들은 그 후 내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고 모델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날것의 이미지와 호평과 악평의 사이에서 논쟁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날것과 논쟁 사이에는 김기덕만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쉰다. 아이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업의 질긴 끈을 일러주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아이는 노승의 말처럼 업을 돌멩이처럼 지고 살아가는데 되돌아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묶인 업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영상을 보지 않고 귀로만 들어도 대사와 음악이 어울려 하나의 드라마를 이루는 묘한 재미가 있다. 51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관객상과 2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술상을 수상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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