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64) 칠처가람 (5·끝) 영묘사

신라 칠처가람 흥륜사지에서 영묘사 명문기와 출토,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 설화 전해지는 곳

경주시 황남동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있었던 곳으로 1963년 사적 제15호로 지정한 곳이다. 그러나 발굴과정에 영묘사라는 명문의 기와가 발견되면서 영묘사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됐다. 사찰은 근래에 세워진 흥륜사 대웅전.
신라는 전불시대에 이미 일곱 곳에 절이 있었다. 불국토로 발전할 인연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칠처가람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칠처가람은 황룡사, 분황사와 같이 지금도 크게 울림을 주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사천왕사는 천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 등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국립사찰로 이름이 전해져 유명하다.

반면 영흥사와 담암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담암사는 오릉의 남쪽이라는 기록과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영흥사는 절터조차 분명하지 않다.

발굴 과정에서 영묘사 터로 밝혀졌지만 흥륜사지로 안내되고 있는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영묘사

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 중 하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 중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

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이다. 이 절터에서 금당터를 비롯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이 영묘사 터로 밝혀졌다.

영묘사의 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영묘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채고 병사를 보내 소탕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묘사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풍요라는 향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는 노동요의 시초였다고 한다.

경덕왕 23년 764년에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세조 6년 1460년에 봉덕사의 신종을 이 절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 탑동 사적 제17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오릉의 숲에 담암사지 당간지주로 전해지는 석재가 방치되고 있다. 담암사지의 삼층석탑 석재와 기초석 등은 박혁거세의 제를 모시는 숭덕전 건립에 활용됐다. 석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되고 있다.
◆담암사

담암사는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전불 칠처가람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진다. 절은 신문왕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청전은 사위를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 오릉 남쪽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해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담엄사지에는 삼층석탑 1기와 당간지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담엄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절터는 거의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당간지주와 초석 등의 남은 석재들은 박혁거세의 제전인 숭덕전을 건립하면서 홍살문과 기초 석 등으로 사용했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당간지주 1기는 오릉 내부의 숲에 방치되어 있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농경지와 오릉 주차장 부지로 변했으나 신라시대 육부촌 시절에는 이곳에 알영양산촌이 있었다고 전한다.

문천과 기린내 등의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설에 의해 영흥사지로 지목되고 있는 서천변.
◆영흥사

영흥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경주시 황남동에 있었던 절이라 전한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다.

기록으로는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사학자들은 지금의 서천변 야구장 일대를 영흥사지로 본다.

신라 법흥왕 22년 535년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영흥사를 창건했다. 2년 뒤 법흥왕이 왕위를 물리고 출가하자 파도부인도 법명을 묘법이라 하고 이 절에 출가해 머물렀다.

진흥왕 33년 572년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도 법명을 묘주라 하고는 역시 영흥사에 출가했다.

신문왕 4년 684년에 이 절을 관리하는 성전을 설치했다. 경덕왕 18년 759년에 감영흥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지귀가 여왕을 기다리다 잠이 든 사이 여왕이 팔찌를 벗어두고 간 사실을 잠에서 깬 지귀가 알고 마음에서 일어난 불이 영묘사를 태웠다는 설화가 있다. 선덕여왕릉.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지귀의 사랑

진평왕 말기에 서라벌 장터에 노리개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는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땅만 살피는 사람이라 하여 지귀라는 별명이 붙었다.

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오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데 지귀의 점포에 곱게 단장한 아가씨 둘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봄처녀들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제비처럼 조잘되며 지귀 점포의 노리개를 요리조리 살폈다.

지귀는 손님들의 시중을 곧잘 들며 비위를 잘 맞춰 웬만한 손님은 모두 뭐라도 하나쯤 사들고 가도록 하는 장사의 신이다. 그런 지귀의 상술은 장터에 이미 쫙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로 그의 입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들면 손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날씨 타령, 허접한 이웃 부부의 싸움 이야기라도 늘어놓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

영묘사에서 발굴된 신라 천년의 미소로 불리는 수막새를 판화로 제작한 전진은 작가의 작품.
그런데 봄비 내리는 그날 운명처럼 찾아온 두 여인의 모습에 지귀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아가씨들이 노리개를 들고 재잘대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격을 묻는 손님의 말도 듣지 못했다.

“이거 얼마예요” 방울 노리개와 토끼모양 머리핀을 하나씩 들고 지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쫑알거리는 두 아가씨의 추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귀가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

묘령의 두 여인은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여행을 즐기는 진평왕의 공주 선덕과 시녀 만주였다. 지귀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시녀 만주가 넌지시 장난을 걸었다. “우리 아씨 예쁘지요”라며 눈을 찡긋하자 홍당무가 된 지귀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노리개를 포장하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

영묘사지, 지금의 흥륜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철쭉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지귀는 선덕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도 설쳤다. 이튿날부터 장터에 나온 지귀는 혹여 그 처녀들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선덕과 만주는 지귀의 노리개를 사가는 단골이 되었다. 지귀는 어느새 마음속 깊이 선덕을 앉히고 매번 그가 만든 노리개를 선물로 준비해 건네곤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지귀는 그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독특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지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인형들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살아있는 것 같아 선덕도 매우 좋아했다.

선덕이 자신이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지귀는 행복에 겨워 밤을 낮 삼아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평왕의 죽음으로 맏딸이었던 선덕여왕은 왕위를 이어받아 장례와 국정을 살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

흥륜사 마당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는 탑이 최근 세워졌다.
선덕여왕이 즉위 1년을 맞아 진평왕릉으로 인사차 하는 나들이 행렬을 바라보다 지귀는 까무러치게 놀라버렸다. 자신이 밤낮으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여인이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 만주도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여왕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3주년을 맞아 영묘사로 제를 올리러 가면서 만주를 통해 지귀에게 아버지를 닮은 실물크기의 인형을 주문했다. 그 이후 지귀가 깎은 나무인형들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영묘사 법당에 하나씩 쌓여갔다. 마침내 지귀는 법당을 가득 채운 인형을 끌어안고 행복한 꿈을 꾸다 심화가 일으킨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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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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