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백흥암(7)

발행일 2020-05-26 14:23:4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모든 게 흥한 큰 가람(百興大蘭若)”.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의 산내 암자 백흥암의 출입 건물인 보화루에 걸려있는 편액 글씨이다. 난야(蘭若)는 아난야(阿蘭若)를 줄인말로 스님이 사는 곳이니 바로 가람을 의미한다. 백흥은 언뜻보면 세속적 소원을 담은듯하나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비워내고 깨끗하며 고요하게 열락의 세계를 지향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정한 선원에도 어울리는 말이다.

팔공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백흥암에 들어서면 오백년 전 고쳐 지은 극락전과 조선시대 목조불단의 백미로 손꼽히는 수미단 등 두 점의 보물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건물마다 볼만한 글씨가 편액이나 주련으로 걸려있어 문화재의 보고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절집이다.

은해사에서 계곡을 끼고 900m 가량 올라가면 신일지(新日池)라는 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에 세 갈래 길이 나타난다. 산길로 가면 태실봉·인종대왕태실, 신일지를 끼고 오른쪽 택골로 가면 운부암, 왼쪽 절골로는 백흥암·중암암으로 갈 수 있다. 백흥암은 신일지의 왼쪽 길인 태실봉 남쪽 절골로 1.5㎞ 지점 경사진 곳에 있다.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1년(861)에 혜철국사(785~861)가 착공하여 그가 입적한 뒤 873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보화루중건기에는 “이 암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기록에 의하면 본래 주변에 잣나무가 많아 창건 당시에는 백지(栢旨)의 거찰이었는데 중간에 암자로 고쳤다. 백지는 신라 때의 사찰이니 창건연대가 유구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조선 전기까지 백흥암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1546년(명종1) 천교대사가 중창하면서 백지사에서 백흥암으로 절 이름을 바꾸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1520년(중종15) 사찰 뒤 팔공산 동쪽 자락인 태봉에 훗날 인종대왕에 오른 태자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는 태실수호사찰로서 위상이 높아진다.

태실수호사찰로서 보호를 받은 증거는 ‘순영제음(巡營題音)’과 ‘완문(完文)’이란 편액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영제음은 감영에 백성들이 민원을 올리면 이에 대해 감영에서 처분한 내용을 말하고, 완문은 조선 왕실에서 향교·서원·결사·개인 등에게 어떤 권리나 특권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문서이다. 태실을 지키는 암자이니 승역을 함부로 침탈하지 말라는 왕의 어압(御押,싸인)까지 새겨넣은 편액 완문이 설치된 1798년 이후로 왕실의 인정과 보호를 받으면서 중흥의 기반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으로 전각과 불화 및 불상 등 가람이 소실되어 중건불사가 이어졌다. 1985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43년(인조21)에 극락전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여 년 뒤 1685년(숙종11) 극락전이 중건됐고, 1730년(영조6) 보화루를 고쳐 지었다. 1858년(철종9) 청봉(靑峰)이 영산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흥암이 융성할때는 수백 명이 기거하면서 수도하던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 사세가 축소되었지만 암자로는 큰 규모이고 사방이 솔숲으로 둘러쌓인 한적한 비구니의 수도 도량이다. 고즈넉한 이 절의 중심 전각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보화루 등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건물들을 돌아보며 예스러운 천년고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포계 팔작지붕에 상서로운 동물도상을 품은 극락전

백흥암의 주 불전인 극락전(極樂殿)은 1546년(명종 1년)에 건립되고 1643년(인조 21년)에 중수하였으며, 1685년(숙종 1년)에 중건한 앞면 3칸, 옆면 3칸의 조선 시대 건축양식을 대표할만한 우아한 단층건물이고 지붕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이 전각은 1984년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고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다. 불상 배치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 관음보살과 오른쪽 대세지보살이 보좌하는 삼존형식이다.

건물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올렸다. 그랭이질한 주춧돌 위에 둥근 두리 기둥을 세웠는데 안쏠림을 준 귀퉁이의 귀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조금 높게 꾸민 귀솟음을 둔 것이 특이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린 다포계 양식이고, 천장은 층단을 나누어서 가는 테두리를 둘러서 꾸며놓아 조선 시대 건축의 멋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극락전 내부는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극락세계가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삼존불 뒷배경은 아미타존도를 중심으로 위에는 천개(天蓋), 아래에는 수미단이 놓여있다. 천장에는 꽃무늬와 단청으로 꾸며져 있고, 벽에도 단청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시선을 옮길 수 없다. 천개는 하늘의 세계로 용이 조각돼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부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수미단은 땅의 세계로 길상의 동물과 식물들이 위를 향해 솟구치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듯하다.

◆조선 목조각의 백미 수미단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은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됐는데 조선 시대 수미단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각과 다양한 도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수미단은 사찰의 불전 안에 불상을 모시는 단으로 불단(佛壇)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수미산(須彌山)이라고 한다. 즉 수미단은 하늘과 땅을 잇는 수미산을 형상화 한 것으로 부처나 보살이 상주하는 신성한 장소를 의미한다.

수미단은 높이 134㎝, 너비 413㎝(정면)로 상‧중‧하대의 삼단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상대는 가리개형의 보탁을 별설하였고 중대는 3단이며, 하대는 족대(足臺)형이다. 조각은 중대에 집중되어 있고 하대에는 안상 내에 용과 귀면을 투각기법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정면에서 중대를 바라보면, 윗부분 1단은 하늘(天)을 상징하는 천상세계로 가로로 다섯 칸을 같은 간격으로 나눈 뒤 좌에서 우로 하늘에 날아다니는 공작, 봉황, 운학, 봉황, 꿩 등을 조각했다. 가운데 2단은 바다(水)를 나타내는 수중세계로 가운데가 넓고 가장자리가 좁은 다섯 칸에 수중에 사는 마갈어(龍魚), 황룡, 황룡, 황룡, 잉어 등을, 아랫부분 3단은 땅(地)을 의미하는 지상세계로 가운데가 넓고 가장자리가 좁은 다섯 칸에 땅에 있는 육지동물인 코끼리, 천마, 사자, 기린, 해태 등을 표현하고 있다. 중대에는 육‧해‧공의 우주가 담겨있고, 천상, 수중, 지상의 새와 물고기와 동물 주변에는 국화, 연꽃, 모란, 동백 등 수많은 꽃과 동자, 개구리, 물총새 등을 아로새겨 놓았다.

이렇게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들이 조각된 것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사찰들이 중수되면서 불단의 장식이 화려해지는 시대적인 영향으로 이 곳 수미단의 도상들도 다양하게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양은 서수(瑞獸), 동물, 꽃, 구름무늬 등 30여 종이나 된다. 유‧불‧도교의 종교적 상징성을 가진 것도 있지만 당시 기복문화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길상적 상징성을 가진 것도 많이 보인다. 이는 불교문화가 전통문화와 섞여 문화융합을 이룸으로 인해 봉황, 기린, 천마, 해태 등 길상적인 것 까지 망라된 것으로 살펴진다.

특히 수미단의 목조각은 사실적 표현으로 완성도가 높아 조선 목조각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날개의 선, 꽃모양 등 굴곡을 살려서 입체적이고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가로로 넓은 공간에 동물들이 걷거나 뛰고 새가 날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했고, 용이 날아 오르는 형상에 꽃이나 식물까지 적절하게 어울어져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조선의 어떤 수미단보다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최고 수준의 조각승이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보화루의 추사 글씨

백흥암에는 산해숭심(山海崇深), 시홀방장(十笏方丈), 극락전(極樂殿), 보화루(寶華樓), 화엄실(華嚴室), 백흥대란야(百興大蘭若), 심검당(尋劒堂) 등 다수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있다. 사찰에는 그 건물을 상징하는 편액이 걸리기 마련이고, 명가의 글씨를 걸어두는 것이 상례이다.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편액은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산해숭심’이다. 가로 235cm, 세로 56cm 크기에 3개의 목판을 가로와 세로를 연결한 뒤 양각으로 새겼다.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현재 보화루에 걸린 것은 모각본이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의미로 예서바탕에 해,행서의 분위기를 가미한 활기찬 운필과 조형성이 돋보인다.

스승인 담계 옹방강이 추사를 격려하며 보낸 “옛 것을 고찰해 오늘을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攷古證今 山海崇深)”란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에 나온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산숭해심(山崇海深)’과 백흥암의 ‘산해숭심’은 글자의 순서와 위치가 다르다. 산(山)자는 글자가 뒤집어져 있다. 그 까닭은 서각을 할 때 원본 위에 화선지를 대고 본을 떠서 새 편액에 붙이는 과정에서 앞뒷면을 뒤집어서 붙인듯하다. 또한 해(海)자도 호암미술관 소장본은 오른쪽 방의 매(每)가 수평에 가까운데 백흥암 모각본은 매(每)가 오른쪽 아래로 기울어져 있다. 아마 본뜬 화선지를 삐뚤게 붙인듯하나 편액 전체를 보면 볼수록 여운이 남는다.

신록의 계절에 천년의 역사향기가 서린 백흥암을 찾아서 극락전과 수미단 그리고 건물마다 달린 편액글씨의 운치까지 음미하면 좋을듯하다. 아울러 문화재의 보고인 청정도량에서 심신을 이완시키면서 안복도 누리는 힐링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정태수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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