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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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험한 정도를 넘어 자신의 소신을 꺾으려고 겁박하거나 목숨마저 위협할 정도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극히 조심하는 정도로는 턱도 없고 독을 차야 한다. 독은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살인도구인 동시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최후수단이다. 그래서 독을 차고 있다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자신을 해코지하면 독으로 공격하고 그마저 힘에 부쳐서 불가능해진다면 독을 먹고 자진하겠다는 뜻이다. 더 이상 불의를 강요하면 죽음으로써 저항하겠다는 결의다.

참혹한 상황에서 독을 차고 산 지 오래지만 최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당한 일들을 당하여 전대미문의 신독을 품고 있다. 맹독을 찬 위태로운 모습이 안쓰럽다며 벗은 시인을 설득한다. 참기 힘든 엄혹한 세상이지만 극단적 대응은 자제하세.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인 걸 어쩌겠나. 그냥 운명이라 여기고 순응하세. 그렇지 않으면 죽을 고생을 각오해야 할 걸세. 이리 살아도 한세상, 저리 살아도 한세상, 너무 강직하면 부러지는 법.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바람 따라 떠다니는 구름처럼 이렁저렁 한세상 살아가세.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 다 사라지고 땅덩이도 부서져 모래알이 될 텐데, 독을 품고 산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엄혹한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났다. 어느 하루 불우한 신세를 원망하지 않은 날이 있었나,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날이 하루라도 있었나. 세상이 아무리 허무하다지만, 이건 아니지. 섣불리 의지를 꺾으려다간 자칫하면 벗 자네도 다칠 수 있네. 앞뒤로 온통 마음을 노리는 이리와 승냥이가 시시각각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있지. 마음을 내놓지 않으면 할퀴고 찢겨 산 채로 짐승들의 밥이 될 신세야. 비록 마음을 빼앗으려고 협박한다 하더라도 독한 마음으로 힘껏 대항하리다. 세상이 허망하다지만 죽는 날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 마음을 빼앗긴 채 외로운 혼으로 떠나갈 순 없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독을 잔뜩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시인을 보고 벗이 독을 놓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유들유들하게 살아가자고 충고한다. 시인은 소신을 지키기 위해 불의하고 부조리한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독을 차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불의에 머리 숙이면서 간 쓸개 다 내놓고 편하고 부끄럽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독약을 마시겠다는 매서운 결의를 보인다. 벗은 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마음의 은유이며, 현실에 갈등하는 자신을 다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을 차고」를 발표한 시기가 일제 말기인 점을 감안하면, ‘독’은 일제식민지에 대한 대항의지 또는 죽음의 각오, ‘이리와 승냥이’는 일제와 친일파를 상징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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