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절개 지킨 반가 여인의 기품 담은 누각

김천 시내에서 남쪽으로 황악산 바람재를 넘어 공자동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감천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2층 누각으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정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계 이익공 팔작지붕 양식의 건물로 1974년 12월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이다.

1625년(인조3년) 원터마을에서 태어난 유학자 부호군 연안이씨 방초(芳草) 이정복(1575-1637)이 사별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흘러 퇴락해진 건물을 1689년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다시 1727년에 보수했는데 이듬해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의 난’ 때 파손되고 말았다. 한동안 부서진 채 방치되다가 1737년에 일어난 홍수로 인해 유실된 누정을 1788년 5대 후손인 이의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세운 것이 현재 우리가 만나는 ‘방초정’이다.

동남향인 ‘방초정’ 앞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고목을 품은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가에는 배롱나무를 비롯해 목백일홍, 나리꽃 등이 어우러져 한 여름에 찾아가면 왜 이곳을 ‘방초(芳草)’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자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상원 마을 입구에서 부터 걸어가면서 보는 연못과 방초정의 풍경이 으뜸이다. 한 시인은 이 주변경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이란 시문도 남겼다.

‘방초정’이 있는 원터 마을은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인 1519년(중종3)으로 추정된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형적인 반촌이다.​

연안이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으로 와서 공을 세운 후 신라에 귀화한 ‘이무’를 시조로 한다. 이무는 본래 중국 노자의 후손으로서 무열왕이 그를 ‘연안후’로 봉하고 식읍을 내린 것이 성씨의 출발이다.

◆방초정과 최씨담(崔氏潭)

‘방초정’은 2층 누각에 팔각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 누각인 점은 일반적인 누정의 형태이나 2층의 방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양 끝에 방이 배치되는 누정의 일반적인 구조와는 달리 방에 앉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게 ‘방초정’의 특징이다.

누정 가운데 자리한 방의 둘레는 벽이 아니라 세 짝의 들문으로 이뤄져 있어 들문을 위로 들어 올려 걸어두면 사방으로 트인 공간을 이룬다. 이는 ‘방초정’이 자리한 곳이 평지라 마을 곳곳을 내려다 보는 것은 물론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과 주변 논밭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한 쪽 방향으로만 보는 구조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소통하기에 유리한 구조를 가진다. 들문을 내려서 닫더라도 문 한가운데 나있는 작은 살창 쌍여닫이문이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굴뚝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 지붕 추녀에는 둥근 활주(闊柱)가 서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방초정’ 앞에는 ‘최씨담’이라 불리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다. 두 개의 섬을 가진 연못은 이른바 ‘방지원도’로 이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인공정원의 일반적인 형태다.

연못가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버드나무가 물가에 깊게 드리워 있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화사한 붉은빛이 연못에 비쳐 장관을 이룬다. 주변에는 오랜 세월 연못과 정자 곁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불두화, 사철나무, 작약, 원추리, 국화, 창포 등이 연못에 떠있는 개구리밥과 어우러져 정취를 더 한다.

이정복이 세운 ‘방초정’과 인공연못인 ‘최씨담’에는 조선의 쓰라린 역사와 연안이씨 집안의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구로다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인솔하는 제4번대가 성주, 지례, 개령, 김산을 지나 추풍령으로 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인근 ‘하로마을’의 화순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던 이정복은 처가에서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로 피신했다. 친정인 ‘하로마을’에 남아 있던 부인 최 씨는 왜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했다.​

산길 40여 리를 걸어 원터마을에 도착했으나 이미 시댁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난 뒤 였다. 시댁식구들이 있는 능지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왜구들과 마주치게 된 최 씨는 왜구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웅덩이에 몸을 던진다. 최씨가 따르던 여종 석이에게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길 당부하고 자신은 명의로 갈아입고 투신하자 석이도 따라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최씨의 나이 열 일곱이었을 때다. 후에 사람들은 이 웅덩이를 ‘최씨담(崔氏潭)’이라 부르고,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넓혀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를 딴 ‘방초정’을 세웠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난간에 오르면 연못의 두 섬은 이정복 부부처럼 안타까워 보이기도 하고, 최씨와 석이처럼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방초정’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최씨 부인이 물에 빠져 죽고 난 후 신랑 이정복은 벼슬 임지에서 돌아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봐야 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을 하게 되지만 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넓게 파서 만든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방초정의 ‘방초’는 당나라 시인 최호(704~705)의 시 ‘등황학루’에서 따왔다. ‘앵무 섬에는 꽃다운 풀들만 가득하구나’(芳草萋萋鸚鵡洲)라는 싯구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다. ‘방초’는 또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 봄 풍경을 읊는 대목에도 나온다.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綠陰芳草勝花時)’라는 대목에서다.

그러나 이정복에게 ‘방초’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부인이 자결할 때가 ‘녹음방초승화시’였던 5월말이나 6월초로 추정된다. 꽃잎 다 떨군 나무들이 새 잎을 달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 뿜을 때 이정복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했던 것이다. 그에게 ‘방초’는 절개를 지킨 부인의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백과 최호가 ‘황학루’에서 앵무 섬을 내려다보며 예형의 죽음을 애도했듯이 이정복도 ‘방초정’에서 ‘최씨담’을 보며 부인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

◆화순최씨 정려각과 여종 석이의 비석​

마을 밖에서 ‘방초정’에 오르려면 정려각을 지나야한다. ‘방초정’ 들머리에 세워진 정려각에는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증 숙부인 화순최씨지려(節婦 副護軍 李廷馥 妻贈 淑夫人 和順崔氏之閭)’라고 쓴 비각과,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婢)’라고 쓰인 작은 비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정복의 부인에게 인조임금이 1632년(인조 10년)에 내린 어필 정려각이다.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는 최씨 부인과 함께 자결한 몸종 석이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연안이씨 후손들이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했으나 종의 비석을 절부의 정려각 앞에 세울 수 없다며 ‘최씨담’에 던져졌다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 발견돼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누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찬미한 시와 글씨를 남겼다. 김천 삼산금오산, 황악산, 대덕산의 중앙을 관통해 흐르는 감천 중류에 위치한 ‘방초정’에는 편액뿐 아니라 20개가 넘는 시판이 걸려있다. 그만큼 ‘방초정’에서 조망되는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방초정’에 올랐을 때 끓어오르는 시상을 시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가운데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방초정십경’이 유명한데, 방초정에는 십경의 제목이 각각 따로 판각돼 기둥과 대들보에 걸려있다. 그 가운데 일경 ‘일대감호(一帶鑑湖)’는 방초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를 시로 표현했다.

檻外鑑湖一帶流 (난간 밖에 감호가 한 줄 흐르니)

明沙白石短長洲 (맑은 모래 흰 돌이 들쑥날쑥한 물가에 있구나)

桃花氣暖春風靜 (복사꽃 기운이 따뜻한 가운데 봄바람이 고요하니)

時有漁郞係片舟 (때때로 고기잡는 사내가 조각배를 매는구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정취는 아쉽게도 현재의 ‘방초정’에 올라서는 느낄 수 없다. 이 시가 말하는 ‘감호’는 ‘감천’으로 현재의 방초정에서 200m 이상 떨어져 있고 둑 아래여서 보이지 않는다. ‘방초정십경’이 지어진 시기가 난간 아래 감천이 흐르는 곳에 방초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정복 부부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방초정’은 지난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도 지정됐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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