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67)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발행일 2020-06-15 10:05:1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백제 법왕과 무왕은 신라 베끼기에 나서 절을 짓고 승려를 양성하며 불교정책을 강화하고 나섰다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 맞서 새로운 부흥을 다짐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모을수 있는 근간으로 국가적인 사찰로 법왕이 시작해 무왕이 완공한 미륵사지 전경.
백제 29대 법왕은 28대 혜왕과 같이 즉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아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당시 삼국시대는 각국이 상대국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많이 활용했다.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혀가자 고구려와 백제는 앞다투어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백제 법왕은 신라가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통한 불교를 장려하고, 화랑제도를 통한 교육을 강화해 국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해 불교 장려정책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법왕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0대 무왕이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무왕은 법왕의 불교장려 정책에 따라 왕흥사를 대대적인 국찰로 완공했다. 이어 불법을 장려해 나라의 힘을 키워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다.

백제의 미륵사는 처음 나라를 상징하는 왕의 부활을 상징하는 왕흥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백성들의 기원을 담기 위해 건립한 동탑.
◆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이고,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황 10년 기미년(599)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질 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

다음해 경신년에는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고, 그때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

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

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짐승들에게도 베푼 너그러움은 온 산에 도탑고/ 돼지며 물고기도 흡족한 혜택에 사해가 인자롭다/ 갑작스레 별세했다 섭섭히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은 바야흐로 꽃다운 봄이리니.

무왕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저수지에 나타난 용을 보고 절을 지어줄 것을 염원해 무왕이 미륵사를 짓고, 이를 염원해 건축한 서탑.
◆백제 법왕과 무왕

-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으로 신라 진평왕 시대인 599년부터 600년까지 1년 남짓 왕위에 있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여선(餘宣) 등으로 전한다.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다.

법왕은 혜왕과 같이 재위 기간이 짧아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 않다. 시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른 599년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모두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600년에 창건하기 시작해 무왕 때인 634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 때에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흙으로 덮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7년 충남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는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왕흥사가 법왕 이전인 위덕왕 때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륵사지에는 동서 양쪽에 높은 당간지주를 세웠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보물 제2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사진은 동편의 당간지주.
-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법왕에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집권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으로 수나라 기록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사서에는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

무왕은 특히 6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627년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

무왕은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다. 611년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다.

신라와 전쟁을 벌이며 백제 부흥에 상당한 성과를 올린 무왕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연못. 무왕은 어머니가 용과 결합으로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관륵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

또 무왕은 삼국유사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용의 아들로 탄생해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미륵사지는 광활한 대지에 건축물이 지어졌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부지에서 발굴된 석재들을 서편에 쌓아두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왕과 무왕의 신라 베끼기

백제 법왕은 급성장한 신라의 국력에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하는 한편 그 힘의 바탕에 의문을 가졌다. 백제는 다소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입장에서 공격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이후 반성의 시간을 가진데 이어 만회의 기회를 노렸다.

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신라의 성장배경과 힘의 원동력,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신라가 성장한 배경에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탄탄한 정신적 결집을 찾아냈다. 또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의 교육철학이 끊임없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잡기에 나섰다.

법왕은 먼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가는 길을 불교적 심리전파라고 결론짓고, 불교중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법왕은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절을 짓기로 하고, 나라의 중심에 거대한 사찰 왕흥사 건설에 나섰다. 왕은 곧 나라이다는 생각에 절을 왕궁처럼 거대하게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선화공주의 염원으로 무왕이 건축했다는 미륵사지 석탑의 모형을 그대로 축소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또 전국에 불교적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사냥을 금지하며 살생을 못하게 했다. 백성들이 마음속에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상징적으로 엄격하게 불교적 이념을 전파했다. 지명법사와 같은 유명 고승을 초빙하고, 승려들의 공부를 지원했다.

법왕의 이러한 판단은 신라가 흥륜사 건축에 이어 왕궁에 버금가는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나라의 중심부에 줄줄이 세워 운영하는데 영향을 받았다.

법왕의 불교 진흥정책은 다음 무왕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왕은 신라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어 정책은 물론 지리적인 특성까지 속속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파악하고 있었다.

전북 익산시는 백제 부흥의 전설적 무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서동설화를 바탕으로 서동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무왕은 결국 왕흥사를 완공하고, 온 국민이 하나로 기원하며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동서 쌍탑을 건립했다. 왕흥사는 국민적 염원을 들어주는 미륵불을 안치하면서 미륵사로 이름을 바꾸어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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