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장

구상

우 몰려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쇠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곡괭이를 휘저으며 마구 쫓아오는데/ 돌아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상여 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에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워싸고 빙빙 돌아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꼭 죽였다//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도깨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었다// 상여 속에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 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을 풍경/ 나의 달가운 꿈속의 꿈이여// 추억의 연못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홍신은 벗어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꽃수레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수난의 장』 (민족문화,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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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현실과 시공을 초월하는 까닭에 그 제약과 한계는 빈곤한 상상력일 뿐이다. 도달 가능한 현실 속에 터 잡고 있다면 희망이지만 현실과 동 떨어진 상상이라면 헛된 몽상이다. 꿈은 돈도 들지 않고 규제나 제약도 없기 때문에 작가의 무대 공간으로 제격이다. 예로부터 덧없는 인생을 깨치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로 꿈을 활용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남가일몽과 한단지몽도 꿈의 무제약성에 기댄 이야기다. 최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로 꿈을 과학과 접목시키는 작업이 활발하다.

사람들이 무섭게 쫓아온다. 쇠똥과 곡괭이로 미루어 판단컨대 비루하거나 맞아죽을 짓을 했음직하다. 정부수립 직후임을 감안하면 부르주아지 지주가 좌파 민중시위대에 쫓기는 상황 쯤 된다. 그 반대 상황일 수도 있다. 이마를 맞아 피가 흐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더 이상 도망 갈 구석이 없다. 평소 같으면 얼씬도 하지 않을 상여 집으로 숨어든다. 시위대가 욕설을 퍼부으며 상여 집을 에워싸고 돈다. 마침내 상여 뚜껑을 열고 들어가 시신처럼 눕는다. 의외로 마음이 편하고 흥겹기까지 하다. 단잠이 들고 꿈속에 또 꿈을 꾼다. 누군가 몸을 닦고 염을 하는 모양이다. 사랑했던 여인이 소환된다. 무표정한 그녀가 넋을 잃고 버선발로 외로이 서 있다. 울긋불긋 화려한 꽃상여에 실려 저승길을 향해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화, 어화. 그리스도가 삼일 후에 부활한 성소, 림보로 가는 길이라 곡성조차 즐겁다. 소복 입은 여인이 뒤따라온다. 삼일만 기다리면 보란 듯이 부활하여 그녀 앞에 다시 서리라.

치안이 불안하고 좌우 이념대립이 심했던 해방공간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한 나날이었다. 못 배우고 잃을 게 없는 머슴보다 마름이나 지주가 더 불안했다. 남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인과 집에서 부리던 머슴의 눈치를 살핀다. 낮엔 그나마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잠을 자야하는 밤이 두렵다. 그 와중에 악몽을 꾼다. 상여 안에 들어가 누워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탓인지 긴장이 풀리고 잠이 온다. 꿈속에 또 꿈을 꾼다. 장례를 치르는 꿈속의 꿈이 왠지 슬프지 않다. 멋진 부활을 꿈꾸고 있는 탓이다. 시인은 꿈속이지만 수난 속에서 반면교사를 본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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