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톺아보기

발행일 2020-06-17 16:57:3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우리 책과 한국사 이야기 外

역사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사건의 한복판에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우리 역사와 관련한 재미난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 책과 한국사 이야기
◆우리 책과 한국사 이야기/부길만 지음/유아이북스/276쪽/1만2천 원

‘왜 한국에서 금속활자가 처음 발명됐을까?’, ‘조선시대에도 책을 판매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이런 다양한 궁금증에 답을 주는 책 ‘우리 책과 한국사 이야기’가 출간됐다.

출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인 부길만 교수가 쓴 이 책은 청소년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기록과 관련한 우리 역사를 정리했다. 중세시대 최첨단 정보기술이었던 금속활자 발명이 왜 한반도에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면서 글을 쓰고 읽는 행위가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특별한 일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는 활판인쇄술을 유럽 최초로 발명해 전파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전에 본 적이 없던 이상한 인쇄기술로 인해 사회적 권위가 흔들린다고 판단한 추기경은 “어느 야만인이 만든 것”이라며 가치를 낮춰 봤다. 책이란 형태로 정보가 널리 공유되자 정보를 독점했던 권력자들이 위협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달랐다. 권력자들 스스로 활자 주조에 앞장서서 출판 사업을 벌였다는 게 저자인 부길만 교수의 주장이다.

금속활자로 많은 책을 발간한 바 있는 태종은 “책이 없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도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태종이 주조하게 한 활자는 무려 10만 자가 넘을 정도다. 한글을 창제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애쓴 세종도 출판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정부 주도로 이뤄진 관영 위주 사업이었음에도 책은 정치, 행정 등 모든 공적인 일에서도 따라야 할 실천의 근거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책을 출간하는 데 있어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널리 읽히길 권장하는 문화다.

대표적으로 성종은 “서적을 다량 인쇄해서 싼값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정책을 세우고 따로 이를 충당할 세금을 책정할 정도였다. 또 정조가 직접 편찬을 주도한 서적 분량만 해도 89종 2천490권이나 된다.

저자는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면서 “그 위대함은 전쟁에서의 승리나 영토의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힘을 드러낸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2인자들 그들은 어떻게 권력자가 되었는가
◆조선의 2인자들/조민기 지음/책비/420쪽/1만9천800원

‘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서슬 퍼런 충신과 ‘왕의 총기를 어지럽혔던’ 흉악한 간신의 실체. 권력을 향한 뜨거운 욕망으로 역사를 뒤흔든 2인자들은 누구인가?

조선 역사 속에서 1인자의 자리를 노렸던 2인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권력이 되었고,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조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그 외 다양한 역사 서적들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신하들은 지나치게 미화돼 있고 임금은 지나치게 비판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은 모두 26명,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순종을 포함하면 27명이다. 이 중 후세에 성군으로 인정받은 인물은 세종과 정조 정도밖에 없다. 반면 임금을 보좌했던 신하들에 대한 평가는 놀랍도록 후하다.

이 책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전제 왕조 국가였던 조선은 과연 임금을 제외하면 ‘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서슬 퍼런 충신과 ‘왕의 총기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간신, 이렇게 극단적인 두 종류의 세력밖에 없었을까?

이 책 ‘조선의 2인자들’은 ‘건국’, ‘창업’, ‘욕망’, ‘권력’, ‘당쟁’이라는 5가지 테마에 걸맞은 총 10명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하륜, 수양대군, 한명회, 임사홍, 김안로, 이준경, 송익필이 그들이다.

이 책 안에 담긴 조선을 풍미했던 2인자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인맥’과 뜻밖의 ‘관계’를 발견한다. 500년 조선 역사를 이끈 그들이 권력을 쟁취하고 충의를 지키기 위해 벌인 일련의 사건들과 그 안에서 발휘한 탁월한 기지와 다양한 처세술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듯 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커다란 동력인 동시에 부패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민혁명군 이상정의 북만주 기행
◆국민혁명군 이상정의 북만주 기행/이상정 지음/이상규 주해/민속원/162쪽/9천500원

일제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인 국민혁명군 중장 이상정이 1931년 ‘혜성’ 10~11월호에 발표한 ‘남북만 일만 리 답사기’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책 ‘국민혁명군 이상정의 북만주 기행’이 출간됐다.

이 책은 북만주 일대의 답사기이다. 이상정은 용진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쫓기다가 1925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유동열, 신영삼과 만나 하얼빈 자무시 인근 퉁허현에서 민족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서북군벌의 펑위샹을 만나 서북벌에 종군해 베이징을 잠시 토벌했으나 만주군벌 장쭤린의 역습공격으로 내몽골로 쫓겨 퇴각하는 과정을 그렸다. 또 쑤이위안에서 권기옥을 만나 결혼해 바오터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내용 등 1925년 이후 파란만장한 중국내 군벌 간의 투쟁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벽사에서 운영하던 ‘혜성’지에 이상정의 육필원고가 일부 일제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고 나머지 원고만 출판됐으나, 이번 ‘국민혁명군 이상정의 북만주 기행’을 통해 이상규 교수가 상세한 해설을 곁들였다.

이상정은 일제강점기 충칭육군 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중앙위원, 군사부장 등을 역임한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주의 시인 이상화 맏형이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성성중학교, 미술,상업학교를 거쳐 코쿠카쿠인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1925년 만주로 망명해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 뒤 중국 펑위샹장군의 서북 국민부대의 장성 참모로 장개석 군대와 통합된 후에도 국민정규군 소장 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 후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1932년 흥사단에 가입했다. 1947년 뇌일혈로 사망했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부인인 권기옥 여사는 이상정과 결혼 후 1943년에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사교 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여성들을 규합해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키고 여성들의 독립사상을 높이는 데 노력했다. 이책의 주해는 경북대 이상규 교수가 맡았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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