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생은 없다.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특별한 생은 없다는 것에 내 운명을 건다. 청소부의 생이 특별하지 않듯이 대통령의 생도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생이 없는 것처럼 특별한 곳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특별하지 않으니 우리의 생도 그저 그럴 뿐이다. 형식적 실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짐 자무시의 영화답게 장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어지는 형식과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이 마치 우리의 삶 같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의 삶은 유장하게 이어지고, 그 이어짐 때문에 어제와 오늘, 내일이 연결될 것 같지만 실은 영화처럼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일 뿐 이것이 내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헝가리에서 뉴욕으로, 클리블랜드로, 플로리다로 이어지는 에바의 삶이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또 어찌 이 모든 것이 각각 개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뉴욕과 클리블랜드, 플로리다는 모두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도 한 장면 장면마다 끊어지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짧은 암전,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장면, 우리의 삶도 그러했던가.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잠깐 암전,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사건들, 삶은 이 사건과 사건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

뉴욕에서,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클리블랜드에서의, 플로리다로 가는 길에서의 에바의 삶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절되어 있고, 단절된 듯 하면서 이어져 있다. 그 모든 것이 에바의 삶이니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은 이어질 것이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우연하게 다가오는 불행과 행운들, 살아 움직이는 동안의 여러 활동들과 모든 것이 단절된 짧은 시간의 암전, 그리고 바뀌는 화면들, 이것이 생이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그 순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 모든 순간이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천국이라도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다는 것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내용의 의미에만 집착하는 우리에게 형식을 통해 대화를 건다. 영화의 형식이 특별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형식으로도 말을 건넨다.

현대는 화려한 컬러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짐 자무쉬는 화려한 컬러를 무시하고 침울한 흑백을 선택한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현재는 때로 몽환적이고 비사실적이며 순간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컬러의 색채감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어렴풋한 안개 같은 시간들, 무어라고 선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들은 언제나 흐릿한 흑백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이 강렬한 컬러들은 실은 착시일지도 모른다. 선명하고 사실적인 현재의 컬러들은 우리의 눈을 교란시키는 환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형식을 사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고 그 내용을 지배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그래서 오래 사유할 문제를 남겨준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