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悲歌)

발행일 2020-06-28 14:07: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비가(悲歌)

신동집

1//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삐에로여/ 작별의 인사말을 아는가/ 너의 눈 속에 한 자락/ 노을 구름은 돈다/ 길 잃은 잠자리의 그리매도 저물면/ 대지의 노래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들/ 늦 도라지 보라 속에/ 꿈을 헤맨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에도 마음이 설레이고/ 삐에로여 잠잠히 춤을 거두어라/ 사람의 손에 인형은 때 묻고/ 술잔에 남은 머루 씨 댓 톨/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2// 계절 사이로 간간이/ 웃음소리는 밝게 들린다/ 여름을 살아남아 여까지 온 사람은/ 비탈에 그늘 여문 가을꽃을 바라본다/ 이것도 그래 다행한 일이다/ 늦 도라지 보라 속에/ 비치며 사라지는 행인의 그림자/ 익어 여문 과일의/ 무게가 문득 손에 무거울 때/ 굴러가는 가랑잎은 누구의 것일까/ 귀뚜리여 아직은/ 죽을 자리를 더듬지 말라/ 시월상달 해 짧은 날에/ 옥빛 바람은 풀어 섞이고/ 이러할 때 상머리 생명은 유정(有情)이다/ 3// 기적소리도 울고 가면 그만/ 누가 오래 견딜까/ 이 멀건 들판을/ 한 줄기 걸인의/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간간이 풍기는 고무 타는 내/ 이러할 때 날카로이/ 새는 노을에 빛나고…/ 저녁 새여 아직은 더 울어라/ 나락 말던 사람의 그리매는 사라지고/ 굽어 도는 강나루 모서리도 저물면/ 남은 건 한 가지/ 최후의 기슭에 별이 뜬다/ 4//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내가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무엇을 위한 여로인가/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일찍/ 해진 길로 발을 돌리고/ 우수수 달력 속에 날은 어둡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삐에로여 잔을 들어라/ 바람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방금/ 너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삐에로여 잔을 놓아라

『비가』 (자유문학,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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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밑머리 희끗하면 인생의 조락을 느낀다. 곧 무대를 떠나야 할 배우이고 고별사를 준비해야 할 때다. 노을에 붉게 물든 구름이 눈동자에 비친다. 잠자리는 돌아갈 길을 잃고 하늘 모퉁이를 나는데, 자연의 섭리에 못 이겨 나뭇잎은 가는 곳 모른 채 허공에 떨어진다. 귀뚜리가 보랏빛 도라지에 숨어 가을이 지나감을 알린다. 즐기던 애장품도 때 묻고 마실 술마저 바닥을 보인다. 한 바탕 꿈같은 인생사다.

새 계절을 맞은 기쁨도 잠시 일 뿐, 시름에 젖은 채 역경 속에 핀 산비탈 가을꽃을 본다. 만추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가랑잎처럼 돌아갈 길이 무상하다. 돌아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귀뚜리여,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없고, 서둘 일도 아니다. 시월상달 푸른 하늘 아래 맑은 바람이 일면 밥상머리 인간은 감성에 흠뻑 빠진다. 가는 세월을 그 누가 막을 손가. 가난한 나그네의 한 가닥 모닥불은 역한 냄새를 피우고 노을을 나는 새의 날개 짓에 날이 선다. 추수가 끝나고 강나루 귀퉁이로 어둠이 번지면 하늘가엔 최후의 별이 뜬다. 지난날들이 스쳐온다. 엿장수 가위소리가 덧없다. 지난 삶에 여한은 없다. 몸과 마음을 편히 하고 담담하게 운명을 맞을 따름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다.

시인은 존재와 생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직관으로 꿰뚫어보아야 하며, 언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삶과 죽음을 통한 존재에 대한 천착은 생명의 근원적 모색과 이어져 있으며 일상적 존재의 정체성 확인으로 나타난다. ‘비가’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인간 존재의 탐구에 충실한 시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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