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감염병 경고등급이 최고 수위인 팬데믹 상황에 놓인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시민들의 일상을 비롯해 사회 전반적으로 수많은 변화가 촉발되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면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외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되고 있다. 어차피 수출입이나 여행 등 국가 간의 교류는 물론, 국내 도시 간의 이동도 위축된 상황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요즘 부각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학은 대구경북학회의 주도로 지난해 경북대와 계명대 등 대구권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처음 채택된 뒤 참여대학의 수가 늘어가는 추세다. 또 용학도서관이 지역학을 주제로 국비 공모사업인 ‘길 위의 인문학’과 ‘인문독서아카데미’를 5년째 추진하는 등 공공도서관과 평생교육계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 대구 역사의 한 축을 이루는 경상감영의 설치 날짜가 지난주 처음 확인되면서 대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연도는 이미 ‘대구읍지’ 등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지만 날짜는 이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경북대 퇴계연구소 특별연구원인 구본욱 박사(철학)는 지난주 임진왜란이 종결된 지 3년째인 1601년(선조 34) 5월24일(음력)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됐다고 밝혔다. 근거는 조선 중기 대구지역 유림 지도자였던 모당(慕堂) 손처눌 선생(1553~1634)이 1600년(선조 33) 1월8일부터 1629년(인조 7) 12월26일까지 30년간 쓴 ‘모당일기(慕堂日記)’다. 이번 성과는 정원재 달서구 부구청장이 구 박사에게 연구를 제안하고 협조함으로써 거둔 것이어서, 지역학 연구자와 지역 공직자의 훌륭한 협력사례이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모당일기 5월24일자에 ‘감사가 부사를 겸하고, 판관이 새로 신설됐다는 기별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 다음날인 5월25일자에 ‘비가 내림. 관아에서 사령이 와서 부사가 오늘 이임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부득이 말을 달려 대구부에 도착했다. 부사와 조촐한 술자리를 하면서 대화했다’는 기록이 모당일기에 있다. 구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전기 200여년 간 경상감영은 경주와 상주 등 경상도 주요 거점을 경상감사가 옮겨 다니면서 집무를 보는 순영(巡營)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경상감사가 대구부사를 겸하면서 대구에 머무르는 유영(留營)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다음날 모당 선생이 비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대구를 떠나게 된 부사와 석별의 잔을 나눴다는 설명이다.

모당일기는 수록된 정보의 양이 많고, 내용이 다양해 17세기 대구지역의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현재 전해지는 원본 6책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소장돼 있으며, 한글 번역작업이 진행 중이다. 모당 선생은 수성구 상동 출신으로, 수성구 황금동에 위치한 청호서원에 배향돼 있다. 그는 수성구 파동 계동정사에서 대구 유학의 문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 선생(1532~1565)의 수제자로 계동 선생이 대구 최초로 건립한 연경서원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팔공산 부인사에 주둔했던 대구지역 의병들의 결집체인 공산의진(公山義陣)을 지휘하는 의병대장으로 활약했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구가 영남권의 행정, 군사, 경제, 교통 중심지로 부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구는 현재 광역지방자치단체인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는 물론,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경상도 전역의 교육과 문화 중심지로도 자리매김하면서 서울과 평양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특히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는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을 추스르기 위해 필수적인 지식정보를 생산하고 확산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정보전달 매체인 책을 경상감영에서 펴냈던 것이다.

경상감영에서 펴낸 책은 ‘영영본(嶺營本)’이라고 한다. 영영(嶺營)은 경상감영의 별칭이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것을 계기로 대구가 영남권 전체 백성의 역량을 강화하는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요즘 관점으로 시민역량을 강화하는 책을 펴냈기 때문에 영남권 기록문화의 본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정이 연기돼 오는 10월16일부터 18일까지 수성못 상화동산과 수성구립도서관에서 열리는 ‘2020 대구수성 한국지역도서전’도 특별전을 통해 영영본과 계동 선생의 가치와 역할을 소개할 계획이다. 부디 이번 기회를 계기로 대구가 영남권 기록문화의 본산이자, 교육문화의 뿌리란 정체성이 확립되길 소망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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